Japan, 維新の嵐 ・ 幕末志士伝(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 中村半次郎(나카무라 한지로)

번역(翻訳): 방석구

中村半次郎(なかむら はんじろう)
나카무라 한지로(中村半次郎)

天保9年(1838) ~ 明治10年(1877). 享年40歳.
텐포 9년(天保 9年, 1838年) ~ 메이지 10년(明治 10年, 1877年). 향년 40세.

 薩摩の下級郷士。人斬り半次郎の名で恐れられた暗殺のプロ。岡田以蔵や田中新兵衛のように、実際に斬った相手の名やその模様などを記した史料はほとんどない。にも関わらず当時屈指の暗殺者といわれたことを考えると、人知れず暗殺剣を振るい、闇から闇へと確実に標的を葬り去った恐るべき実力がうかがえる。
 사츠마(薩摩)의 하급부시(下級郷士). 살인자 한지로(半次郎)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한 암살의 프로(Pro). 오카다 이조(岡田以蔵)나 타나카 신베에(田中新兵衛)처럼, 실제로 벤 상대의 이름이나 그 상황 등을 기록한 사료는 대부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굴지(屈指)의 암살자(暗殺者)라 불린 것을 생각해보면, 은밀히 암살검(暗殺剣)을 휘둘러, 어둠에서 어둠으로 확실히 표적을 매장한 무서운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주(註): 나카무라 한지로(中村半次郎)는 메이지시대(明治時代)에 들어 키리노 토시아키(桐野利秋)라고 칭한다.

 あまりに人を斬るため、しばしば師と仰ぐ西郷隆盛から叱責された。また坂本龍馬が暗殺された直後、西郷に「またやったか!」と激しく叱られたという話が残っている。伊集院鴨居に師事し、薩摩のお家芸、示現流を極めた。敵をすれ違いざまに一刀で殺す「抜き」は、刀を鞘に収める手の動きすら見せぬ早業だったという。示現流は刀を高く担ぐフォームが有名だが、中村の場合は居合に近い形で剣を使ったようだ。
 지나치게 사람을 베었기 때문에, 누차 스승으로 모시던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암살당한 직후, 사이고(西郷)에게 또 「한 것이냐!」라고 격하게 꾸중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伊集院鴨居에 사사(師事)해, 사츠마(薩摩)에 대대로 전하는 전통 무예인 지겐류(示現流)를 익혔다. 적을 스쳐 지나가며 한칼에 죽이는 「누키(抜き)」는 칼(刀)을 칼집(鞘)에서 취하는 손의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는 빠른 솜씨였다고 한다. 지겐류(示現流)는 칼(刀)을 높게 취하는 자세가 유명하지만, 나카무라(中村)의 경우는 이아이(居合)에 가까운 형태로 검(剣)을 사용한 것 같다.

 直情径行にして、己れの無学を恥じることさえ知らず、当時はやった尊藩、陛下などの言葉の意味も取り違えて口にしていた。また文盲だったという説もある。
 직전경행(直情径行) 하여, 자신의 무학(無学)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시 몸담던 존한(尊藩), 폐하(陛下) 등의 뜻조차 잘못 이해해 입에 올리고 있었다.

 中村の行動理念は、感情のみに支配された幼稚なもので、わずかでも異を唱える相手には暗殺剣でカタをつけた。その手綱を握ることができたのは崇拝してやまぬ西郷だけだったが、西南戦争ではその西郷とも衝突し、1万数千の兵士を率いて暴走。玉砕した。
 나카무라(中村)의 행동 이념은 감정에만 치우친 유치한 것으로,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상대에게는 암살검(暗殺剣)을 내리쳤다. 그 말고삐를 조절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숭배해마지 않는 사이고(西郷) 뿐이었지만, 세이난센소우(西南戦争)에서는 그 사이고(西郷)와도 충돌해, 1만 수천의 병사를 이끌고 폭주했다. 끝내 옥쇄(玉砕)했다.

용어 설명
– 지겐류(示現流) じげんりゅう
 검술(剣術) 류파(流派)의 하나. 텐쇼 연간(天正, 1573-1592), 사츠마(薩摩) 한시(藩士), 토고 토베 시게카타(東郷藤兵衛重位)가 창시. 사츠마 한시의 대부분이 가르침을 받았다. 토베지겐류(東郷示現流).

– 이아이(居合) いあい
 무예(武芸)의 하나. 발도(抜刀)를 하는 순간 상대를 베는 기술. 앉은 상태로부터 발도(抜刀)를 기본으로 한다.

– 세이난센소우(西南戦争) せいなん-せんそう 
 메이지 10년(明治 10年, 1877年),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를 중심으로 하는 카고시마(鹿児島) 부시(武士) 가문의 반란. 세이칸론(征韓論)에 의해 하야한 사이고(西郷)는 낙향해서 시갓코(私学校)를 일으켰지만, 그 생도가 사이고(西郷)를 추대하여 거병, 쿠마모토(熊本) 친다이(鎮台)를 포위했지만, 정부군(政府軍)에 진압당해, 사이고(西郷)등의 지휘자는 대부분 자결했다. 메이지(明治) 초기의 부시(武士) 가문의 반란 가운데 최대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의 반정부운동(反政府運動)의 중심은 자유민권운동(自由民権運動)으로 이동했다.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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