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 維新の嵐 ・ 幕末志士伝(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 松平慶永(마츠다이라 요시나가)

번역(翻訳): 방석구, 총 진행도 50/56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

松平慶永(まつだいら よしなが)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

文政10年(1828) ~ 明治23年(1890). 享年63歳.
분세이 10년(文政 10年, 1828年) ~ 메이지 23년(明治 23年, 1890年). 향년 63세.

 8代将軍、吉宗が開いた御三卿の一つ、田安家に生まれる。12代将軍、家慶に特にかわいがられ、名門親藩、越前松平家の当主となった。そうした特別な家格も手伝って、慶永は政事総裁職などの重職を歴任し、衰退する幕府政治の屋台骨を担った。
 8대 쇼군(将軍), 요시무네(吉宗) –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 가 연 고산쿄(御三卿)의 하나인 타야스가(田安家)에서 태어났다. 특히 12대 쇼군(将軍) 이에요시(家慶) – 도쿠가와 이에요시(徳川家慶) – 에게 귀여움을 받아, 명문 신판 다이묘(親藩大名)인 에치젠(越前) 마츠다이라가(松平家)의 당주(当主)가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문벌을 이유로 요시나가(慶永)는 세이지 소사이쇼쿠(政事総裁職) 등의 중직(重職)을 역임하고, 쇠퇴하는 바쿠후(幕府) 정치를 지탱했다.

 一介の医者だった橋本左内を初め、中根雪江、由利公正(三岡八郎)などの逸材を身分に関わらず取り立て、世に送り出した。越前から遠く離れた肥後熊本の、しかも過激な学者として煙たがられていた横井小楠までも、他藩士ながら招いて、なんと政治顧問に据えている。
 일개 의사였던 하시모토 사나이(橋本佐内)를 시작으로, 나카네 유키에(中根雪江), 유리 키미마사(由利公正) 등의 인재를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발탁해 세상에 내보냈다. 에치젠(越前)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히고(肥後) 쿠마모토(熊本), 그것도 과격한 학자로서 모두가 거북하게 느끼는 요코이 쇼난(横井小楠)까지도, 타한(他藩)의 한시(藩士)임에도 불러 정치 고문에 앉혔다.

 反面、慶永にはどうしようもない気弱さがあり、土壇場で踏ん張る根性というものがなかった。幕政のトップに君臨しながら、強権を振るわず誰かれなく気を配る八方美人的な態度は、時として政局をさらに混乱させることさえあった。
 반면, 요시나가(慶永)에게는 어쩔 수 없는 심약함이 있어, 최후까지 버티는 근성이라는 것이 없었다. 바쿠세이(幕政)의 최상부에 군림하면서도, 강권을 휘두르지 못하고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배려하는 팔방미인(八方美人)적인 태도는 때로는 정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까지 했다.

 が、言い換えればそれは、生粋の殿様が先天的に持つ階級特性のようなもので、徳川慶喜にも松平容保にも似た一面はあった。14代将軍継嗣問題で政敵、井伊直弼に敗れた後、慶永がすんなり政界に復帰できたのはそうした人当たりの良さからだ。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귀하게 자란 토노사마(殿様)가 선천적으로 지닌 계급특성과도 같은 것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나 마츠다이라 카타모리(松平容保)에게도 비슷한 일면이 있었다. 14대 쇼군(将軍)의 후계 문제로 정적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에게 밀려난 후, 요시나가(慶永)가 별 어려움 없이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대인관계의 부드러움 때문이었다.

 坂本龍馬の活動を支援したのも、龍馬の魅力に惚れ込んだという以外に、倒幕派ともつながりを持ち、来たるべきクライシスに備えようという意識も働いたはずだ。八方美人は慶永の欠点ではあったが、それを知り抜いた上で、逆に政治的な工作に利用するだけのしたたかさがあったように思う。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활동을 지원했던 것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료마(龍馬)의 매력에 반했다는 것 외에 토바쿠파(倒幕派)와도 유대를 가져, 다가올 위기(Crisis)에 대비한다는 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팔방미인(八方美人)이라는 것은 요시나가(慶永)의 결점이었지만, 그것을 스스로 꿰뚫어 거꾸로 정치적 공작으로 이용할 정도의 능란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