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의 셋푸쿠(切腹, 1962): 리뷰

Harakiri

셋푸쿠(切腹)

영화 리뷰
 주의! 이하 글에는 스포일러spoiler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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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칸에이 7년(寛永 7年, 1630年) 5월 13일. 이이(井伊) 카몬(家門)을 방문한 한 명의 로닌(浪人)이 있었다. 이름은 츠쿠모 한시로(津雲半四郎). 그는 몰락해버린 후쿠시마(福島) 카몬의 가신(家臣)이었다고 했다. 그의 방문 목적은 간단했다. 카몬의 몰락 이후 로닌으로써 가난과 치욕 속에서 사느니 부시(武士)로서 명예롭게 셋푸쿠(切腹)할 수 있도록 안뜰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다이묘(大名)는 부재중이었고, 그를 대신해 카로(家老)인 사이토 카게유(斎藤勘解由)가 그를 맞았다. 사이토는 얼마 전 같은 이유로 방문했던 치지와 모토메(千々岩求女)라는 로닌 이야기를 꺼냈다. 셋푸쿠를 하러 왔으나 망설임이 보였고, 칼 조차 대나무로 만들었다고 했다. 즉, 다른 의도가 엿보였다는 것으로, 그 즈음 로닌들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방편인 거짓 셋푸쿠로 부시도(武士道)를 인정받아 임관하거나, 돈을 챙기려는 수작이라는 것이었다.

 사이토(斎藤)는 거짓 셋푸쿠(切腹)라면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츠쿠모(津雲)는 배에 한 일자를 긋는 시늉을 했다. 의식을 행하기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고, 사이토는 그의 의식을 도와줄 카이샤쿠닌(介錯人)을 소개했으나, 그는 거부하고 염두 했던 부시(武士)를 지목했다. 허나 그는 아직 등청하지 않았고, 이윽고 그를 호출하기에 이르렀다. 카이샤쿠닌을 기다리는 동안 츠쿠모는 옛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2 –
 전란의 아즈치・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를 도쿠가와 에에야스(徳川家康)와 함께 풍미했던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正). 그의 적색 갑주와 문장(紋章)이 도입부에 등장한다. 허나 극의 마지막에서는 그 명예로운 것이 한낱 로닌(浪人)에 의해 피칠갑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야 만다. 여기에 영화 ‘셋푸쿠(切腹)’의 모든 내용이 함축 되어있다.

 이이케(井伊家)로 대변된 그들은 과거의 영예에 사로잡혀 본질은 잊고 허상에만 매진했으나, 로닌(浪人)으로 전락한 치지와 모토메(千々岩求女)는 사무라이(侍)라는 이상을 벗어나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다가가려고 했다. 그러하기에 가족을 위해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거짓 셋푸쿠(切腹)’를 하여 돈을 구걸하려 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과거 영예의 허상에 빠진 이이케(井伊家)는 모토메(岩求女)가 사무라이(侍)로서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생각하여 목검으로 자진케 한다. 이에 모든 사정을 알게 된 츠쿠모 한시로(津雲半四郎)가 ‘본질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몸으로 말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하기에 그들에게 죄를 묻고 셋푸쿠(切腹)로써 매듭을 지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간략히 당시의 정세를 설명해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감췄던 발톱을 드러낸다. 히데요시의 배하 다이묘(大名)는 문치파와 무장파로 나뉘는데 그들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戦い)를 승리로 이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이에야스(家康)는 정세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가신단(家臣団) 출신의 다이묘(大名)와 항복한 다이묘를 섞어 영지를 배분하였으나, 그의 아들이 세이이다이쇼군(征夷代将軍)에 이르자, 정권을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그들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극에 등장하는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가 전자,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후자에 해당된다.

인물 설명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ふくしま‐まさのり
 1561-1624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및 에도(江戸) 초기의 무장(武将). 오와리(尾張) 사람으로, 어린 시절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쫓아 각지에서 공훈을 세웠다.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에서는 시치혼야리(七本槍)의 필두로서 활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는 도쿠가와(徳川) 쪽에 속해, 아키(安芸)의 히로시마(広島)의 성주(城主)가 되었지만, 성의 증축을 힐책 받아 영지를 몰수, 시나노(信濃)로 전봉 당했다.

–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いい‐なおまさ
 1561-1602 아즈치・모모야마시대(安土桃山時代)의 부쇼(武将).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 임관했다.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와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에서 용명(勇名)을 떨쳤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용어 설명
– 시즈가타케 전투(賤ヶ岳の戦い) しずがたけ-のたたかい
 텐쇼 11년(天正 11年, 1583年) 4월, 시즈가타케(賤ヶ岳) 부근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를 토벌한 전쟁.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를 지지한 히데요시(秀吉)와 삼남인 오다 노부타카(織田信孝)를 지지한 카츠이에(勝家)와의 대립이 원인이었다. 카츠이에(勝家)와 노부타카(信孝)는 자결해, 히데요시(秀吉)의 전국제패(全国制覇)를 위한 기초가 마련되었다.

–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 こまき-ながくてのたたかい
 텐쇼 12년(天正 12年, 1584年), 오와리(尾張) 코마키(小牧) ・ 나가쿠테(小牧)에서 벌어진 토요토미 히데요시군(豊臣秀吉軍)과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연합군(連合軍)과의 전쟁. 승패가 결정 나지 않아, 장기전이 되었기 때문에 강화를 맺어서 종결되었다.

– 오다와라 정벌(小田原征伐) おだわら-せいばつ
 텐쇼 18년(天正 18年, 1590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와라성(小田原城)에서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 ・ 우지나오(氏直) 부자를 공격해 멸망시킨 전쟁. 이것에 의해 히데요시(秀吉)의 전국제패(全国制覇)가 완성되었다.

–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せきがはら-のたたかい
 케이쵸 5년(慶長 5年, 1600年) 9월 15일,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를 주축으로 하는 동군(東軍)이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의 서군(西軍)을 무찌른 전쟁.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천하의 실권을 장악한 이에야스(家康)에 대립한 미츠나리(三成)는 여러 제대명(諸大名)을 규합해 전쟁을 벌였지만, 코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의 배반에 의해서 서군(西軍)은 참패해, 미츠나리(三成) 등은 처형되고,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는 셋츠(摂津) ・ 카와치(河内) ・ 이즈미(和泉) 60만(万) 코쿠(石)의 일개 다이묘(大名)로 전락했다. 그 결과, 도쿠가와씨(徳川氏)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흔히 「천하(天下)를 판가름하는 전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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