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의 도그빌(Dogville, 2003): 리뷰

도그빌(Dogville)

영화 리뷰
 주의! 이하 글에는 스포일러spoiler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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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그빌Dogville이라는 미국 로키 산맥에 위치한 외딴 마을에 갱단으로부터 도주중인 그레이스Grace라는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주민들과 친근해지기 위하여 성심성의껏 그들을 돕지만, 주민들은 그녀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르는 갱단의 보복과 왜곡된 도덕의식道徳意識으로 불편해한다. 이것은 그녀의 열성적인 노동과 도덕주의moralism자인 톰Tom에 의해 억제된다.

 그러나, 그레이스Grace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감에 따라, 주민들의 불편함은 광기로 변해간다. 그들은 집단 이기주의와 자기 합리화로 그녀를 학대하고, 유일한 도덕주의자였던 톰Tom 역시 자기기만自己欺瞞에 빠져 집단에 편승한다. 이윽고, 톰Tom의 연락을 받은 갱단이 마을에 도착하지만, 갱단의 리더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이제 그녀는 마지막 결단을 내린다.

– 2 –
 먼저 영화를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극중의 인물들을 성향에 따라 네 개의 그룹으로 나누고 현실에 빗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외지인인 그레이스Grace. 그녀는 이주 노동자, 흑인, 동성애자, 심신장애자 등의 소수자 집단minority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새로운 (개념적이거나 실질적인)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다.

 (2) 기존 집단인 주민들.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며 외지인을 호기심과 경계심 뒤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보편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과 집단의 이익을 바탕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다. (3) 도덕주의자인 톰Tom. 기존 집단에 소속되어있으나 의식 개혁을 위하여 노력한다. 다만, 실질적이라기보다는 형식적인 면이 강해 보인다. 이러한 인물도 우리 주위에서 이따금씩 볼 수 있다. (4) 갱단으로 묘사된 힘power. 그러나 하필 갱단인지….

 도그빌Dogville은 이런 관계 속에서 머리가 아플 만큼 수많은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집단은 갱단으로부터 도피중인 그녀를 따뜻하게 맞이하지만, 공권력인 경찰조차 그녀를 현상수배하자, 이제는 그에 상응한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다. 후반에 그녀가 자신이 당했던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만 그들은 죄책감罪責感을 갖기보다는 침묵하고 모든 원인을 그녀에게로 돌린다. 집단 이기주의와 폐쇄적 집단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주민들보다 톰Tom의 죄악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자기기만自己欺瞞적 도덕주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훔친 건 그였지만 둘 다 연루되면 안 된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누명을 씌우고, 사랑하는 이가 성폭행 당하고 있음에도 침묵한다. 또한 집단이 단결하여 더 이상의 희망이 없어지고, 자신의 속내까지 들키자 자기합리화로 외면하고 집단의 앞잡이가 된다. 최후에는 “고통은 따랐지만 교훈적이지 않았나요?”라는 궤변詭弁을 늘어놓는다.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은 미국米国 3부작의 시발인 『도그빌Dogville』을 통하여 미국米国의 사회 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는 국지적이라기 보다는 일반적 문제로 보입니다. 일례로 한국韓国에서 보여지는 이주 노동자, 동성애자, 심신장애인 등의 소수자 집단minority 차별과 방패장 문제, 황우석 사건, 디워D-War 사태 등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감독이 단지 인간에 대한 냉소冷笑와 환멸幻滅에 머물러 있다고도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미묘하고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화두話頭를 던짐으로써, 관객이 자신과 집단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며 토론하여 긍정적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은 꼭 보셔야 할 문제작이라 생각됩니다. 니콜 키드먼(Nicole Kidman)의 연기도 탁월 합니다. :-)

사족(蛇足): (1) 묵시록적 분위기에서 장막이 내려간 후, 느닷없이 경쾌한 리듬의 데이빗 보위David Bowie의 「Young Americans」가 흘러나와서 잠시 당황했으나, 배경이 된 스냅사진을 보니 감독 참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2) 일반적으로 극의 마지막에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상징하기 위하여 어린아이를 보여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이까지 처벌処罰한 상황에서 분필로 그려져 있던 개만이 생존하여 실체로 변화하는 장면을 보고 의아해했습니다. 개가 희망이란 말인가? 아니면 정녕 이 마을 사람들은 개만도 못한 이들이란 말인가? 라고요.

관련 링크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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