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翻訳): 방석구
島津斉彬(しまづ なりあきら)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
文化6年(1809) ~ 安政5年(1858). 享年50歳.
분카 6년(文化 6年, 1809年) ~ 안세이 5년(安政 5年, 1858年). 향년 50세.
薩摩藩主。もともと裕福だった薩摩島津家の財政をバックボーンに、次々と西洋文明を摂取。特に西洋の最新科学技術の導入に積極的だった。領内に集成館と花園製練所という2大科学工場を設置し、銃火器、ガラス、火薬などを製造する一方、電気通信やガスの実験まで行なっていたという。また反射炉を築いて、大砲や蒸気船の独力生産にも成功している。最盛期には双方の工場で1000人以上の工員が働いていた。
사츠마(薩摩) 한슈(藩主). 본디 풍요한 사츠마(薩摩) 시마즈가(島津家)의 재정을 백본(Backbone)으로, 잇달아 서양문명을 섭취했다. 특히 서양(西洋)의 최신 과학기술(科学技術)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영내(領内)에 슈세이칸(集成館)과 화원재련소(花園精錬所) – 이화학연구소(理化学研究所) – 라는 2대 과학공장(科学工場)을 설치해, 총화기(銃火器), 글라스(Glass), 화약(火薬)등을 제조하는 한편, 전기통신(電気通信)이나 가스(Gas)의 실험까지 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반사로(反射炉) – 천장의 반사열을 이용하여 원료를 녹이는 형식의 용광로 – 를 축조하고, 대포(大砲)나 증기선(蒸気船)의 독자 생산에도 성공하고 있었다. 전성기에는 양쪽의 공장(工場)에서 1000명 이상의 공원(工員)이 일하고 있었다.
この島津斉彬も、坂本龍馬や高杉晋作と同タイプの人間だった。歴史を回転させる宿命を背負い、それを果たすとあっけなく天へ帰ってしまったという意味でだ。彼らと同様、斉彬にも果たさねばならない役割があった。
이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와 같은 타입(Type)의 인간이었다. 역사를 변화시키는 숙명을 짊어져, 그것을 이루고 미련 없이 귀천(帰天)했다고 하는 의미이다. 그들과 다름없이, 나리아키라(斉彬)에게도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역할이 있었다.
斉彬は盟友となった時の老中首座、阿部正弘と共に、大胆な幕政改革に乗り出す。中でも14代将軍継嗣問題では、阿部に協力して徳川慶喜の擁立を後押しした。その政治工作に、斉彬は秘書の西郷隆盛を抜擢。毎夜のごとく自室の庭に西郷を呼んでは、押し寄せる海外列強の脅威を説き、それに対抗するための幕政改革の必要性を説き、そして最終的には、英邁な藩主や有為の士による連合政権・統一国家の樹立を説いた。
나리아키라(斉彬)는 맹우가 된 당시의 로쥬(老中) 수좌(首座)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와 함께, 대담한 바쿠세이개혁(幕政改革)에 적극 임했다. 그 중에서도 14대 쇼군(将軍)의 후계자 문제에서는, 아베(阿部)에 조력해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옹립을 지원했다. 그 정치공작에 나리아키라(斉彬)는 비서인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를 발탁. 매일 밤마다 자신의 저택으로 사이고(西郷)를 불러서, 밀려오는 해외열강(海外列強)의 위협을 설명해, 그것에 대항하기 위한 바쿠세이개혁(幕政改革)의 필요성을 설명,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영매(英邁)한 한슈(藩主)나 유능한 부시(武士)에 의한 연합정권(連合政権) ・ 통일국가(統一国家)의 수립을 설명했다.
継嗣問題に敗れた直後、悪性のコレラにかかって急死。このため、井伊直弼派による暗殺、あるいは藩内の保守派、島津久光擁立派による毒殺という説もある。
쇼균(将軍)의 후계자 문제에 패한 직후, 악성 콜레라(Cholera)에 걸려 급사. 이 때문에 이이 나오스케파(井伊直弼派)에 의한 암살(暗殺), 혹은 한내(藩内) 보수파(保守派),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 옹립파(擁立派)에 의한 독살(毒殺)이라는 설도 있다.
後に志士となる西郷の行動指針は、全て斉彬の薫陶によるものであり、何よりもこの西郷を見出し、世に送り出したことが、斉彬が果たした歴史的偉業だったといえる。
후에 지사(志士)가 된 사이고(西郷)의 행동지침은, 모두 나리아키라(斉彬)의 훈도에 의한 것으로, 무엇보다도 사이고(西郷)를 발견하고, 세상에 배출한 것이 나리아키라(斉彬)가 이룬 역사적 위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