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 維新の嵐 ・ 幕末志士伝(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 入江九一(이리에 쿠이치)

번역(翻訳): 방석구

入江九一(いりえ くいち)
이리에 쿠이치(入江九一)

天保8年, 1837 ~ 元治元年, 1864. 享年28歳.
텐포 8년(天保 8年) ~ 겐지 원년(元治 元年). 향년 28세.

 吉田松陰 門下の秀才。久坂玄瑞らと並ぶ激烈な尊王攘夷運動家で、後に方向性は異にすることになるが、高杉晋作とは親友と呼び合う間柄だった。入江は藩内の下級組足軽の生まれで、対する高杉は中流以上の上士である。封建制度の江戸時代には、人と人とは身分という縦のつながりのみで関係が成立していた。が、入江と高杉の間には確かに、”友情”という、この時代にはまだなかった結びつきがあった。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문하의 수재. 쿠사카 겐즈이(久坂玄瑞)들과 견줄만한 격렬한 손노죠이(尊王攘夷) 운동가로, 후에 지향점은 다르게 되지만,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이리에(入江)는 한(藩)내의 하급 아시가루(足軽) 태생이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카스기(高杉)는 중류계급인 죠시(上士)였다. 봉건제도(封建制度)의 에도시대(江戸時代)에서는 사람과 사람은 신분이라는 종적 연결만으로 관계가 성립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리에(入江)와 다카스기(高杉) 간에는 분명히 “우정”이라고 하는 이 시대에는 아직 없었던 연결이 있었다.

 それを証明するエピソードが、山県有朋の回顧録にある。「一度高杉が怒り出したなら、何人にもこれを止めることができ得ず、ただ松陰先生と入江杉蔵(九一)に説かれると、どうしたものかいつもおとなしくなった」
 그것을 증명하는 에피소드(Episode)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의 회고록에 있다. 「한 번 다카스기(高杉)가 화내기 시작하면, 어떤 사람도 그것을 만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만 쇼인(松陰)선생과 이리에 스기죠우(入江杉蔵) – 쿠이치(九一) – 에게 설득되면, 어떻든지 늘 점잖게 되었다」

 松陰の薫陶を最も強く受けて育ち、松陰の老中間部詮勝暗殺計画にも参加。計画は未遂に終わるが、入江はその実行グループの中心だったため、幕吏に目をつけられて投獄されている。松陰は晩年、弟子たちの保身・出世の姿勢を「君らは功をなすつもり」となじったが、入江だけは別格に扱われていた。
 쇼인(松陰)의 훈도(薫陶)를 가장 강하게 받고 자라, 쇼인(松陰)의 로쥬(老中) 마나베 아키카츠(間部詮勝) 암살 계획에도 참가했다. 계획은 미수로 끝났지만, 이리에(入江)는 그 실행그룹(Group)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바쿠리(幕吏)에 주목되어 투옥 되었다. 만년에 쇼인(松陰)은, 제자들의 보신(保身) ・ 출세의 자세를 「자네들은 공을 쫓고 있다」라고 힐책했지만, 이리에(入江) 만큼은 별격(別格)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高杉との友情は終生変わらず、奇兵隊の創設でも最大限の協力をしている。だが同じく盟友だった久坂が禁門の変に巻き込まれたため、これを見捨てることもできず参戦。重傷を負って自決した。一説には藩領の同志に敗戦を伝えるべく戦場を脱出しかけたところを、敵兵の槍に眉間を貫かれて絶命したともいう。
 다카스기(高杉)와의 우정은 평생 변하지 않았고, 키헤이타이(奇兵隊)의 창설에도 최대한의 협력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동지였던 쿠사카(久坂)가 킨몬의 변(禁門の変)에 휩쓸리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참전. 중상을 입고 자결했다. 일설에는 한료(藩領)의 도시(同士)에게 패전을 전언할 작정으로 전장을 탈출하던 중, 적병의 창에 미간(眉間)을 꿰뚫려서 절명(絶命)했다고도 한다.

용어 설명
– 바쿠리(幕吏) ばくり
바쿠후(幕府)의 관리

– 키헤이타이(奇兵隊) きへい-たい
1863년,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등에 의하여 창설된 쵸슈한(長州藩)의 군대. 아시가루(足軽) ・ 고시(郷士) 외 백성 ・ 쵸닌(町人) 등 한(藩)의 정규병 이외로 조직되어, 제2차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 보신센소우(戊辰戦争) 등에 활약.

–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ちょうしゅう-せいばつ
바쿠마츠(幕末)기, 도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의 쵸슈한(長州藩) 토벌전쟁. 겐지 원년(元治 元年, 1864年) 7월, 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変)에서 황거(皇居)로 발포한 것을 이유로 바쿠후(幕府)는 출병. 시코쿠(四国) 함대(艦隊) 시모노세키(下関) 포격(砲撃)사건(事件) – 시코쿠 연합함대 시모노세키 포격사건(四国連合艦隊下関砲撃事件) – 에 의해 보수파(保守派)로 실권이 바뀌고 있던 쵸슈한(長州藩)은, 항전하지 않고 바쿠후(幕府)에 항복 – 제1차(第一次)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그 후, 쵸슈한(長州藩)에서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등의 토바쿠파(討幕派)가 반란에 의해 실권을 장악, 바쿠후(幕府)에 대립. 바쿠후(幕府)는 케이오 2년(慶応 2年, 1866年) 6월 재차 정벌을 시작하지만, 제한(諸藩)의 반대 등으로 사기가 오르지 않고, 거한(挙藩) 체제인 쵸슈군(長州軍)에 각지에서 패해, 재 정벌은 실패, 바쿠후(幕府)의 권위(権威)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 제2차(第二次) 쵸슈 세이바츠(長州征伐).

– 보신센소우(戊辰戦争) ぼしん-せんそう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보신(戊辰)의 해에 시작되어, 유신정부군(維新政府軍)과 큐바쿠후(旧幕府)측간의 사이에서 16개월간에 걸쳐서 싸웠던 내전(内戦). 정월 토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에서 승리했던 정부군(政府軍)은, 4월 에도죠(江戸城)를 접수, 우에노(上野)에 틀어박힌 쇼기타이(彰義隊)는 간토(関東) 각지에서 큐바쿠후(旧幕府) 주전파(主戦派)를 토벌하고, 오우에츠렛판동맹(奥羽越列藩同盟)를 맺어서 대항하는 제한(諸藩)을 아이즈센소우(会津戦争)를 정점으로 10월에는 귀순시켰다. 이듬해 5월, 최후의 거점(拠点) 하코다테고료카쿠(箱館五稜郭)를 함락(陥落)시키고, 내전(内戦)은 종결, 메이지(明治) 절대주의국가 확립으로의 길이 열렸다.

– 우에노센소우(上野戦争) うえの-せんそう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5월, 우에노(上野) 칸에이지(寛永寺)에서 농성하고 있던 쇼기타이(彰義隊)와 관군(官軍)의 전투.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가 지휘하는 관군(官軍)에 하루 만에 진압당했다。

– 쇼기타이(彰義隊) しょうぎたい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측근의 규바쿠신(旧幕臣)을 중심으로 결정된 유지대(有志隊). 요시노부(慶喜) 호위(護衛) ・ 에도(江戸) 경비(警備)를 명목(名目)으로 우에노(上野) 칸에이지(寛永寺)에 웅거(雄據)하였지만,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가 지휘(指揮)하는 관군(官軍)에 의해 괴멸(壊滅).

– 아이즈센소우(会津戦争) あいづ-せんそう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5월, 오우에츠렛판동맹(奥羽越列藩同盟)의 중심이 되었던 아이즈한(会津藩)이, 정부군(政府軍)에 저항했던 전투. 같은 해인 메이지 1년(明治 1年, 1868年) 9월에 개성(開城).

– 큐바쿠(旧幕) きゅうばく
메이지 유신(明治維新)후의 도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를 가리키던 말.

– 오우에츠렛판동맹(奥羽越列藩同盟) おうう-えつれっぽんどうめい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5월 보신센소우(戊辰戦争)에서 오우(奥羽) ・호쿠에츠(北越)의 제한(諸藩)이 결탁한 반정부(反政府) 군사동맹(軍事同盟).

– 고시(郷士) ごうし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농촌에 살던 부시(武士).

– 킨몬의 변(禁門の変) きんもん-のへん
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変)

– 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変) はまぐりごもん-のへん
겐지 원년(元治 元年, 1864年) 7월, 전년 8월 18일의 정변에서 쿄토(京都)를 쫓겼던 쵸슈한(長州藩)이 형세만회를 위하여 쿄토(京都)에 군사를 전진시켜, 아이즈(会津) ・ 사츠마한(薩摩藩) 등의 군사와 하마구리고몬(蛤御門) 근처에서 교전(交戦)하고 패했던 사건(事件).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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