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카 14년(文化 14年, 1817年) ~ 메이지 20년(明治 20年, 1887年). 향년 71세.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의 이복(異腹)동생. 본인은 한슈(藩主) 취임에 흥미가 적었지만, 생모인 오유라(お由羅)나 카로(家老)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등에 추대되어, 본의는 아니지만 형과 다투는 형태가 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사츠마(薩摩)의 후계자다툼인 오유라 소동(お由羅騒動)이다. 그러나 급사(急死)한 나리아키라(斉彬)는 한내(藩内)가 소란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히사미츠(久光)의 아들, 타다요시(忠義)를 차기 한슈(藩主)로 하도록 유언(遺言)했다. 히사미츠(久光)는 한슈(藩主)의 실부(実父)로서 실권을 잡았다.
호쾌하고 서양문물을 좋아하는 증조부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나리아키라(斉彬)와 달리, 히사미츠(久光)는 보수적(保守的)으로 영국(領国)유지에만 부심했던 아버지 나리오키(斉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런 이유로 아버지를 웃도는 초보수파(超保守派)로 자라, 나리아키라(斉彬)가 추진한 산업화(産業化) 정책에 맹렬히 반대했다. 슈세이칸(集成館)등을 폐지(廃止)하고, 또 형이 기른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등 그 일파를 심하게 증오했다. 사이고(西郷)는 히사미츠(久光)에 의해, 생애 2번이나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히사미츠(久光)의 행동 배경에는, 자신의 보수사상(保守思想)에 더해진, 형에게 향하는 강렬한 젤러시(Jealousy)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격동의 정국에서, 사츠마(薩摩)라는 강대한 세력을 보유했지만, 어떤 명확한 비전(Vision)도 갖지 못한 자신. 그것에 비해서 형은 바쿠세이(幕政)에 관여해, 당시의 로쥬(老中)에게도 인정받아, 거듭 타한(藩)의 한슈(藩主)로부터 존숭(尊崇)받고 있었다.
결국 히사미츠(久光)는, 한내(藩内)에서 명망(名望)을 모으는 사이고(西郷)들에게 토라진 듯 등을 돌렸고, 그들은 그 것을 호기로 한세이(藩政)의 주도권을 잡았다. 「토바쿠(倒幕)는 전부 사이고(西郷)와 오쿠보(大久保) -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 가 저지른 일이다. 나 자신이 바란 것은 아니었다.」라고 유신(維新)후에 내씹은 것은, 히사미츠(久光)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인물 설명
-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 しまづ しげひで
엔쿄 2년(延享 2年, 1745年) ~ 텐포 4년(天保 4年, 1833年).
에도후기(江戸後期)의 사츠마(薩摩) 한슈(藩主). 개화(開化) ・ 문교정책(文教政策)에 힘을 써, 조시칸(造士館) ・ 의학원(医学院)등을 조영(造営). 호화로운 생활방식은 유명해서, 한의 재정을 위협했다. 만년(晩年), 즈쇼 히로사토(調所広郷)를 발탁해 재정재건을 도모했다.
용어 설명
- 조시칸(造士館) ぞうしかん
사츠마한(薩摩)의 한교(藩校). 안에이 2년(安永 2年, 1773年) 한슈(藩主)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가 창설. 와가쿠(和学) - 국학(国学) - 과 함께 양학(洋学)도 중히 여겼다.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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