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세이 10년(文政 10年) ~ 케이오 4년(慶応 4年). 향년 42세.
바쿠신(幕臣). 미국 파견사절, 칸죠부교(勘定奉行), 보병부교(歩兵奉行) 등, 바쿠후(幕府)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던 인재.
오구리케(小栗家)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미카와시대(三河時代)부터의 가신(家臣)으로, 가록(家禄) 2500 고쿠(石)의 하타모토(旗本)인 명사(名士)였다. 이러한 경력도, 오구리(小栗)가 강경한 바쿠후(幕府) 세력 유지론자가 되었던 것에 관계하고 있다.
한자(漢学), 켄(剣), 포술(砲術)을 당대 일류의 인물에게 수학(修学), 또한 방미(訪米) 경험을 통해 개명적(開明的) 사고를 몸에 익힌 엘리트(Elite). 재정통(財政通)으로 군사(軍事)에도 밝아서, 일찍부터 개국(開国) 같은 부국강병(富国強兵)을 주창했다. 게다가 외교교섭(外交交渉)도 능숙하다고 하는, 카츠 카이슈(勝海舟)와 견줄 도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뛰어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구리(小栗)에게는 합리성을 너무 중요시하는 단점이 있어, 그 점에서는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와도 비슷한 점이 있었다. 포커 페이스(Poker face)로 동료의 부정을 허용하지 않고, 목적수행을 위해서는 독단 선행하는 부분도 공통되고 있다. 그렇지만 하급계층 부시(武士)가 중심세력이 된 토바쿠(倒幕) 측에 관해서, 오구리(小栗)가 속한 바쿠후(幕府)는 가문(家門)과 형식을 중히 여기는 낡은 체제로, 탁월(卓越)한 오구리(小栗)의 정책은, 문벌만을 자랑하는 무능한 동료 ・ 상사에게 묵살당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만일 오구리(小栗)가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유신(維新)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거무스름한 피부와 괴이하게 넓은 이마, 교활한 눈매가 특징적이고, 자신의 아들조차, 그 얼굴을 보고 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또 8살 무렵부터 타바코(Tabaco)를 즐겨, 키세루(Khsier)를 입에 물은 모습이 능숙했다고 하니, 소년 시절부터 무서운 인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용어 설명
- 하타모토(旗本) はたもと
(1) 군진(軍陣)에서 다이쇼(大将)가 있는 곳. 즉 본영(本陣).
(2) 에도시대(江戸時代)에 쇼군(将軍)에 직속(直属) 가신(家臣)으로써 봉록 1만(万) 고쿠(石) 이하인 부시(武士).
- 토바쿠(倒幕) とうばく
바쿠후(幕府)를 타도하자는 주장.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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