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翻訳): 방석구

小松帯刀(こまつ たてわき)
코마츠 타테와키(小松帯刀)
天保6年, 1835 ~ 明治3年, 1870. 享年36歳.
텐포 6년(天保 6年, 1835 年) ~ 메이지 3년(明治 3年, 1870年). 향년 36세.
島津家中の名門、肝付家に生まれ、島津斉彬の命で特に小松家の養子となった。斉彬の側近候補だったが、周りを立てる篤実な性格を久光にもかわいがられた。寺田屋騒動、生麦事件など難題を次々にクリアーした手腕を買われ、28歳の若さで家老に抜擢される。
시마즈(島津) 집안의 명문, 키모츠키케(肝付家)에서 태어나,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의 명으로 특별히 코마츠케(小松家)의 양자가 되었다. 나리아키라(斉彬)의 측근이였지만, 겸손한 성격을 히사미츠(久光)에게도 인정받았다. 테라다야 소동(寺田屋騒動),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등 난제를 차례로 푼 수완을 인정받아, 28세의 젊은 나이로 카로우(家老)에 발탁되었다.
幕末における薩摩の傑物というと、真っ先に西郷隆盛と大久保利通の名が挙がる。が、彼らがあれほどまで自由に行動し、自在に藩を動かすことができたのは、ひとえに小松の協力があったからである。西郷も大久保も慕ってくる仲間は多かったが、薩摩藩という巨大勢力を統轄する実務権限は皆無だったのである。実質的に藩をまとめ、西郷らの戦略を具体化したのは、小松だった。
바쿠후(幕府) 말기에 있어서 사츠마(薩摩)의 걸출한 인물이라 하면, 제일먼저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와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의 이름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까지 자유롭게 행동하고, 자유자재로 한(藩)을 움직이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코마츠(小松)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고(西郷)도 오쿠보(大久保)도 추종하는 세력은 많았지만, 사츠마한(薩摩)이라는 거대세력을 다스리는 실무권한은 전무했던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藩)을 결집시켜, 사이고(西郷)들의 전략을 구체화한 것은, 코마츠(小松)였다.
西郷を見出し、育てた斉彬が、同じように自ら見染めた小松である。人格的魅力は西郷に劣らず、大局を見据える戦略眼はあるいは大久保に勝っていたかもしれない。あくまで武力倒幕に固執した大久保に対して、小松は最後まで平和倒幕路線を捨てなかったことでも、それは証明される。どちらの戦略が民衆の望みだったか。答えは明らかだ。
사이고(西郷)를 찾아내, 양성한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가, 동일하게 스스로 첫눈에 반한 사람이 고마츠(小松)였다. 인격적 매력은 사이고(西郷)에 뒤지지 않고, 대국을 응시하는 전략안(戦略眼)은 어쩌면 오쿠보(大久保) 보다 뛰어났을지도 모른다. 철저히 무력 토바쿠(倒幕)를 고집한 오쿠보(大久保)에 반해서, 코마츠(小松)는 최후까지 평화 토바쿠(倒幕) 노선을 버리지 않았던 것에서도, 그것은 증명된다. 어느 쪽의 전략이 민중의 바램이었을까? 답은 맹백하다.
これで分かるように、小松は薩摩閥の中では西郷以上に坂本龍馬のよき理解者であり、庇護者だった。亀山社中の創立でも、それにともなう艦船の購入でも、小松は何くれなく龍馬に力を貸してくれている。とりもなおさず、それは小松が龍馬の構想にいたく傾倒し、同じ新国家建設の夢を見ていたからに他ならない。
이것에서 알 수 있듯이, 코마츠(小松)는 사츠마(薩摩) 가문에서는 사이고 (西郷) 이상으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좋은 이해자이자, 비호자였다. 카메야마샤츄(亀山社中)의 창립에서도, 거기에 수반되는 함선(艦船)의 구입에서도, 코마츠(小松)는 여러 모로 료마(龍馬)에 조력해주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코마츠(小松)가 료마(龍馬)의 구상에 몹시 심취해, 동일한 신 국가 건설의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용어 설명
– 테라다야 소동(寺田屋騒動) てらだやそうどう
분큐 2년(文久 2年, 1862年), 쿄토(京都) 후시미(伏見)에 있는 후나야도(船宿) 테라다야(寺田屋)에서, 사츠마한(薩摩藩)의 손죠파(尊攘派), 아리마 신시치(有馬新七)등이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명령을 받았던 같은 한(藩) 소속의 한시(藩士)에게 암살(殺害)당했던 사건(事件). 손죠파(尊攘派)와 고부갓타이파(公武合体派)의 대립에 의한다.–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 なまむぎ-じけん
분큐 2년(文久 2年, 1862年) 8월, 나마무기촌(生麦村)에서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행렬을 흩뜨린 영국(Inglez) – 포루투칼어 – 인을 사츠마(薩摩) 한시(藩士)가 살해한 사건. 영국(Inglez)은 바쿠후(幕府)와 사츠마한(薩摩藩)에 범인(犯人)인도와 배상금을 요구해, 바쿠후(幕府)는 배상금을 지불했으나 사츠마한(薩摩藩)은 이를 거부해, 사츠에이센소우(薩英戦争)의 원인이 되었다.– 사츠에이센소우(薩英戦争) さつえいせんそう
분큐 3년(文久 3年, 1863年) 7월, 나마무기 사건(生麦事件)의 보복을 위해 카고시마만(鹿児島湾)에 내습한 영국(Inglez) – 포루투칼어 – 동양함대(東洋艦隊)와 사츠마한(薩摩藩)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 쌍방모두 손실이 커, 동년 11월 요코하마(横浜)에서 화친이 성립되었다. 이후 사츠에이(薩英)는 긴밀도를 높였다.– 사츠에이(薩英) さつえい
사츠마한(薩摩藩)과 영국(Inglez).– 카메야마샤츄(亀山社中) かめやましゃちゅう
나가사키(長崎)에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에 의해 결성된 무역결사. 카이엔타이(海援隊)의 전신.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사진 출처
근대 일본인의 초상(近代日本人の肖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