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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維新の嵐 ・ 幕末志士伝(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 武市半平太(타케치 한페이타)

번역(翻訳): 방석구

武市半平太(たけち はんぺいた)
타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

文政12年(1829) ~ 慶応元年(1865). 享年37歳.
분세이 12년(文政) ~ 케이오 원년(慶応). 향년 37세.

 土佐藩の郷士だったが、身分は白札という上士扱いだった。土佐を代表する尊攘運動家。土佐勤皇党を結成し、藩を挙げて尊王攘夷運動に巻き込もうとしたが、山内容堂や後藤象二郎ら藩指導部と対立。多くの党員とともに弾圧、処刑された。
 토사한(土佐藩)의 고시(郷士)였지만, 신분은 시로후다(白札)라고 일컫는 죠시(上士) 대우였다. 토사(土佐)를 대표하는 손죠(尊攘) 운동가였다. 토사(土佐) 킨노당(勤皇党)을 결성해, 한(藩)을 일으켜 손노죠이(尊王攘夷) 운동에 끌어드리려고 했지만, 한슈(藩主) 야마노우치 요도(山内容堂)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등과 대립. 수많은 당원과 함께 탄압 후 처형당했다.

 小野派一刀流と鏡新明智流を修めた一流の剣客。さらに和漢の学から書画にまで才を見せ、若くして長者の風格を備えた人物だった。また長州、薩摩など他藩にも広く名を知られ、西郷隆盛は維新後、「武市先生が生きておられれば、オイごときが今、こうしていばってはおられませぬ」と、その存在を高く評価していた。
 오노하잇토류(小野派一刀流)와 쿄신메이치류(鏡新明智流)를 수학한 일류 켄카쿠(剣客). 더욱이 와칸(和漢) – 일본(日本)과 중국(中国)의 학문 – 에서 서화(書画)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재능을 보여, 젊어서 장자(長者)의 풍격(風格)을 갖춘 인물이었다. 또한 쵸슈(長州), 사츠마(薩摩)등 타한(藩)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는 유신(維新)후, 「타케치(武市) 선생이 살아 게셨다면, 오쿠보(大久保)나 이와쿠라(岩倉) –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와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 가 이렇게 활개치지는 않는다」라고, 그 존재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天皇好きとあだ名されるほど強固な勤皇思想を持ち、土佐勤皇党の結成後には郷士層の指導者として、藩政府に大きな影響力を持った。
 텐노(天皇)를 사모한다고 불릴 만큼 공고한 킨노(勤皇)사상을 가져, 토사(土佐) 킨노당(勤皇党)을 결성한 후에는 고시(郷士)층의 지도자로서, 한정부(藩政府)에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다.

 身長は180㎝以上もあった偉丈夫で、瑞山と号し、先生と崇拝されたが、それに奢らぬ篤実な性格だった。顔色は女性のように白く、酒は一滴もダメ。オマケに甘党で夫人以外の女性にも興味は持たないという、謹厳実直の人。エラが張っていたために、親友の坂本龍馬からアギ(土佐の方言であごのこと)と呼ばれていたという。
 신장은 180cm이 넘는 대장부로, 즈이잔(瑞山)이란 호를 붙이고, 선생이라고 숭배되었지만, 그러함에도 거만하지 않는 독실한 성격이었다. 낯빛은 여성처럼 희고, 술은 한 방울도 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부인 이외의 여성에게는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근엄 실직(実直)한 사람이었다. 하관이 벌어져 있었기 때문에, 벗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로부터 아기(アギ) – 토사(土佐) 방언으로 턱을 가리킴 – 라고 불렸다고 한다.

 一方では、目的達成のために「暗殺」という非常手段を用いることがしばしばで、特に京で威勢をふるっていた頃には、岡田以蔵や田中新兵衛を使って、佐幕派の人物を次々に葬った。武市の指令で殺されたといわれる人物は、史料に残っているだけでも数十に及ぶ。こうした陰湿な部分は、親友の龍馬とは対照的だった。
 한편으로는, 목적달성을 위해서 「암살」- 요시다 토요(吉田東洋) – 이라는 비상수단을 자주 사용하였고, 특히 쿄토(京都)에서 위세를 떨칠 때에는 오카다 이조(岡田以蔵)나 타나카 신베에(田中新兵衛)를 – 히토키리(人斬り屋)로 유명 – 이용해, 사바쿠파(佐幕派)의 인물을 잇달아 매장시켰다. 타케치의 지령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는 인물은 사료에 전하는 것만으로도 수십에 이른다. 이런 음습한 부분은 벗인 료마(龍馬)와는 대조적이었다.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