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翻訳): 방석구
江戸湾防御の洋式海上砲台
에도만(江戸湾) 방어를 위한 서양식 해상포대(砲台)
品川台場
시나가와 다이바(品川台場)
対外脅威に備えて、築造された台場。
대외 위협에 대비하여 축조된 포대(台場)
配置には東京湾の地形環境が関係していた。
도쿄만(東京湾)의 지형환경을 이용해 배치하였다.
監修・文=高山優
감수 ・ 글: 타카야마 마사루(高山優)
威信をかけた築造
명예를 건 축조
嘉永六年(一八五三)八月、江戸幕府は江戸湾上に巨大な島を造り始めた。海上砲台の御台場である。
카에이 6년(嘉永 6年, 1853年) 8월, 에도 바쿠후(江戸幕府)는 에도만(江戸湾)위에 거대한 섬을 만들기 시작했다. 해상포대(砲台)인 오다이바(御台場)였다.
幕府は当初、台場を海上に十一基築造する予定で、まず第一から第三までの三基の台場築造に着手した。さらに五カ月後の嘉永七年(一八五四)一月、第四から第七までの台場築造を開始した。第一から第三台場は、着工からわずか九か月後の嘉永七年五月に竣工した。台場の築造が、壮絶な土木工事であったことが察せられる。しかし、劣悪な財務状況にあった幕府は、莫大な工費を要する台場築造について見直しを強いられ、その結果、第五・第六台場の工事は継続したものの、第四・第七台場は中途で工事中止、第八以降の台場の工事に着手することはなかった。
바쿠후(幕府)는 당초, 해상에 11기(基)의 다이바(台場)를 축조할 계획으로, 먼저 제1에서 제3까지 3기의 다이바(台場) 축조에 착수했다. 다시금 5개월 후인 카에이 7년(嘉永 7年, 1854年) 1월에, 제4에서 제7까지의 다이바(台場) 축조를 개시했다. 제1부터 제3다이바(台場)는 착공에서 불과 9개월 후인 카에이 7년(嘉永 7年, 1854年) 5월에 준공되었다. 다이바(台場)의 축조가 대단한 토목공사였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열악한 재무상황에 있었던 바쿠후(幕府)는 막대한 공사비를 요하는 다이바(台場) 축조에 대해서 재검토를 강요당했다. 그 결과, 제5 ・ 제6 다이바(台場)의 공사는 계속되었지만, 제8 이후의 다이바(台場) 공사에는 착수하지 않았다.
台場は、江戸湾の海洋環境をうまく利用した計画に基づいて築造されている。
다이바(台場)는 에도만(江戸湾)의 해양환경을 잘 활용한 계획을 바탕으로 축조되었다.
江戸湾、すなわち東京湾内は、概して遠浅で、所々に洲が発達していることが知られている。台場は、こうした洲の上に築造された。当時の洲の深さを記す史料は乏しいが、明治五年(一八七二)の史料に記された、洲と洲の間に形成された(深場)の深さについての記載を見ると、例えば第二台場と第五台場の間にある本 の場合、台場付近での満潮時の深さは約二・四~二・七mであったとある。ちなみに第一台場遺跡では、土台木とともに石垣(いしがき)全体を支えていた厚み一m程の盛土層が、海面下一m前後で検出されている。
에도만(江戸湾), 즉 도쿄만(東京湾)내는 대체로 물이 얕아서, 곳곳에 주(洲)가 발달해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이바(台場)는 이런 주(洲) 위에 축조되었다. 당시 주(洲)의 깊이를 기록한 사료는 부족하지만, 메이지 5년(明治 5年, 1872年)의 사료에 기록된 주(洲)와 주(洲) 사이에 형성된 후카바(深場)의 깊이에 관한 기재를 보면, 예컨대 제2다이바(台場)와 제5다이바(台場) 사이에 있는 후카바(深場)의 경우, 다이바(台場) 부근에서의 만조 (満潮)때 깊이는 약 2.4 ~ 2.7m였다고 한다. 참고로 제1다이바(台場) 유적에서는 토대목(土台木)과 함께 석벽전체를 지탱하는 두께 1m 정도의 성토층(盛土層)이 해면 아래 1m 전후로 검출되고 있다.
次に、台場の築造過程を概観してみよう。既述のように、台場築造は海中に小島を造ることから始められた。
다음은, 다이바(台場)의 축조과정을 개괄해보자. 기술한 것처럼 다이바(台場) 축조는 바다가운데에 소도(小島)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小島築造のための土は、対岸の高輪泉岳寺の境内、あるいは御殿を取り崩して採取した。もっこで海岸まで運び、船に積み替えて現場へ運び込んだ。第一台場遺跡の発掘調査で、石垣の後方がブロック状のローム土によって満たされていたことが確認されており、対岸の高台から採取した土砂を小島造りに用いたとする記録の信憑性の高いことを指摘できる。
소도(小島) 축조를 위한 흙은 건너편 타카나와(高輪) 센가쿠지(泉岳寺)의 경내나, 혹은 고텐야마(御殿山)를 헐어서 채취했다. 하역그물(畚)로 해안까지 운반해, 배로 옮겨 실어 현장으로 운반되었다. 제1다이바(台場) 유적발굴조사로 석벽의 후방이 블록(Block) 모양의 롬(Loam)토에 의해 채워져 있던 것이 확인되고 있어, 건너편 타카다이(高台)에서 채취한 토사를 소도(小島)제작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신뢰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小島が完成すると、その周囲に石垣を構築した。石垣石は、伊豆半島周辺で採石した安山岩を用いた。江戸城の石垣と同質の石材である。石垣構築は、十露盤地形と呼ばれる土台を組むことから始められた。長さ五m程の杭を打ち込み、その上に、材を井桁状に組み合わせた土台木を置く。これで石垣本体を支えたのである。第一台場遺跡の調査成果では、土台木の材は圧倒的に赤松材が多く、また杭には杉材が多用されていたことが明らかとなっている。これらの材は主に多摩や下総など、江戸周辺から集められた。
소도(小島)가 완성되자, 그 주위에 석벽을 구축했다. 석벽의 돌은 이즈반도(伊豆半島) 주변에서 채석한 안산암(安山岩)을 사용했다. 에도성(江戸城)의 석벽과 동질의 석재였다. 석벽구축은 주판지형(十露盤地形)이라고 불리는 토대를 짜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길이 5m 정도의 말뚝을 막아, 그 위에 목재를 이게타(井桁) 모양으로 – 井 – 짜맞춘 토대목(土台木)을 설치한다. 이것으로 석벽본체를 지탱했던 것이다. 제1다이바(台場) 유적의 조사성과로는 토대목(土台木)은 압도적으로 소나무(赤松)가 많고, 또 목재에는 삼나무(杉)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가 있다. 이들 목재는 주로 타마(多摩)나 시모우사(下総) 등, 에도(江戸) 주변에서 모아졌다.
石垣の裏込めは、第一台場遺跡では奥行二・五m程と推定された。また裏込めの最奥部には、石垣の正面と逆の方向を向く裏積み石が数段積み上げられていた。
석벽의 우라고메(裏込め)는 제1다이바(台場)의 유적에서는 오쿠유키(奥行)가 2.5m 정도로 추정된다. 또한 우라고메(裏込め)의 가장 깊은 곳에는, 석벽 정면과 역방향을 향해 우라 츠미이시(裏積み石)가 두서너 단 쌓여있었다.
石垣の高さは、満潮時、海水面から一丈九尺ほど(約五・七m)とされ、その上位に堤が周り、内側は窪められた平場となっている。大砲は堤の裏手に配され、平場には陣屋などの施設が置かれた。
석벽의 높이는 만조(満潮)시 해수면에서 1장(丈) 9척(尺) 정도(약 5.7m)로, 그 상위에 둑을 둘러, 내측은 움푹 패인 평지로 되어있다. 대포(大砲)는 둑의 우라테(裏手)에 배치되어, 평지에는 병영(兵営) 등의 시설을 설치했다.
台場は、時の政府が威信をかけて築造したものであったが、台場が実戦で使われることはついになかった。
다이바(台場)는 당시의 정부가 위신을 걸고 축조한 것 이었지만, 다이바(台場)가 실전에서 사용된 일은 한번도 없었다.
용어 설명
– 시나가와 다이바(品川台場) しながわ-だいば
도쿄만(東京湾) 시나가와(品川) 앞바다에 있는 포대(砲台). 카에이 6년(嘉永 6年, 1853年) 미함(米艦)의 우라가(浦賀) 내항에 의해, 에도 바쿠후(江戸幕府)가 에가와 타로자에몬(江川太郎左衛門)의 건의로 에도(江戸) 방위를 위해 축조했다. 11기(基)를 예정했지만, 다음해, 카나가와조약(神奈川条約) – 일미 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 – 을 체결해, 5기(基)를 완성한 것으로 중단. 현재 2기(基)가 남아, 수상공원(水上公園)이 되어있다. 오다이바(御台場).– 센가쿠지(泉岳寺) せんがくじ
도쿄도(東京都) 항구(港区) 타카나와(高輪)에 있는 소토슈(曹洞宗) 사찰. 산호(山号)는 반쇼잔(万松山). 케이쵸 17년(慶長 17年, 1612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명에 의해 소토사쿠라다(外桜田)에 창건되어, 카에이 18년(嘉永 18年, 1641年) 현 위치로 이동되었다. 개조(開祖)는 몬난소칸(門庵宗関)이다. 아코(赤穂) 한슈(藩主)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와 오이시 요시오(大石良雄) – 오이시 쿠라노스케(大石内蔵助) – 등의 아코로시(赤穂浪士)의 묘가 있다. 소토슈(曹洞宗) 에도(江戸) 3대 사찰의 하나.– 아코로시(赤穂浪士) あこうろうし
겐로쿠 15년(元禄 15年, 1703年) 12월 14일 밤, 에도(江戸) 혼죠마츠자카쵸(本所松坂町)의 키라 코즈케노스케(吉良上野介) – 키라 요시나카(吉良義央) – 의 저택을 습격해서, 주군(主君) 아사노(浅野) 타쿠미노카미(内匠頭) –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 – 의 원수를 갚은 47인의 아코한(赤穂藩)의 로시(浪士).– 우라고메(裏込め) うらごめ
석벽이나 터널(Tunnel) 복토(覆土) 등의 뒤쪽에, 쇄석(砕石)이나 자갈을 채우는 것.– 오쿠유키(奥行) おくゆき
안길이. 가옥(家屋) ・ 토지(土地) 등의 입구에서 안쪽 끝까지의 거리.– 우라 츠미이시(裏積み石) うら-つみいし
뒤쪽에 쌓아 올린 돌. 또는 주춧돌.– 장(丈) じょう
척관법(尺貫法)의 길이의 단위. 10척(尺).– 척(尺) しゃく
길이의 단위. 촌(寸)의 10배, 장(丈)의 1/10.– 촌(寸) すん
길이의 단위.– 우라테(裏手) うらて
건물(建物)등의 뒤쪽, 배후.
원문 출처
역사군상시리즈(歴史群像シリーズ) 바쿠마츠대전(幕末大全) 상권(上巻) 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