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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維新の嵐 ・ 幕末志士伝(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 後藤象二郎(고토 쇼지로)

번역(翻訳): 방석구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後藤象二郎(ごとう しょうじろう)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天保9年(1838) ~ 明治30年(1897). 享年60歳.
텐포 9년(天保 9年, 1838年) ~ 메이지 30년(明治 30年, 1897年). 향년 60세.

 幼少時に父を亡くしたため、義理の叔父、吉田東洋の薫陶を受けて育つ。若くして才覚を発揮し、郡奉行や普請奉行、近習目付などを歴任。後に土佐藩の参政となり、山内容堂の懐刀として、土佐藩を倒幕勢力の柱の一つに押し上げる。東洋の暗殺後、江戸で蘭学や航海術を学び、英語にも目を向けるなど先見の明があった。いずれの学問においても抜きん出た学才を見せ、エリートコースを着々と歩む。
 어릴 적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의붓 숙부, 요시다 토요(吉田東洋)의 훈도를 받고 자랐다. 젊어서 기지를 발휘하고, 코오리부교(郡奉行)나 후신부교(普請奉行), 근습 메스케(目付け)등을 역임. 후에 토사한(土佐藩)의 정치에 참여하여, 한슈(藩主) 야마노우치 요도(山内容堂)의 후토코로 가타나(懐刀)로서, 토사한(土佐藩)을 토바쿠(倒幕)세력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토요(東洋) 암살후, 에도(江戸)에서 란가쿠(蘭学)나 해양술(航海術)을 배웠고, 영어에도 눈을 돌리는 등 선견지명이 있었다. 어느 학문에 있어서도 출중한 학문상의 재능을 보여, 엘리트(Elite) 코스(Course)를 순조롭게 걸어왔다.

 思想的には、幕府に同情的だった東洋、容堂両名の影響を強く受け、自身も土壇場までは公武合体論者だった。また土佐は古来、上士・郷士間の身分差が甚だしく、上士だった後藤も例に漏れず郷士を厳しく差別した。過激な尊攘論を唱える土佐勤皇党を激しく憎み、盟主、武市半平太を筆頭に党員を一斉に処刑。遺恨を残す。
 사상적으로는, 바쿠후(幕府)에 동정적이었던 토요(東洋), 요도(容堂) 두 사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자신도 마지막까지 고부갓타이(公武合体)론자였다. 또한 토사한(土佐藩)은 예로부터, 죠시(上士) ・ 고시(郷士)간의 신분차이가 격심하여, 죠시(上士)인 고토(後藤)도 예외 없이 고시(郷士)를 혹독하게 차별했다. 과격한 죠이론(尊攘論)을 주장하는 토사(土佐) 킨노당(勤皇党)을 심하게 증오해, 맹주 타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 – 타케치 즈이잔(武市瑞山) – 를 필두로 당원을 일제히 처형. 원한을 남겼다.

 しかしイギリスの外交官で日本通だったアーネスト・サトーは、後藤をして「懐が深く、何事にも動じない度量を持ち、西郷(隆盛)と比肩し得る人物」と高く評価している。実際、時流が煮詰まって公武合体論が有名無実となると、武市の親友で倒幕活動家の坂本龍馬に接近。助力を求めた。龍馬もこれに応え、大政奉還、船中八策など起死回生の秘策を後藤に授け、土佐藩は倒幕勢力の一翼にすべり込むことができた。
 그러나 영국(Inglez) – 포루투칼어 – 의 외교관으로 일본통인 어네스트 사토우(Ernest Satow)는, 고토(後藤)를 「도량이 넓고, 무슨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넓은 마음을 지녀,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와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실제, 시류가 급박해져 고부갓타이(公武合体)론이 유명무실하게 되어도, 타케치(武市)의 벗으로 토바쿠(倒幕) 활동가인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에 접근. 조력을 구하였으며, 료마(龍馬)도 그것에 응해,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 센츄핫사쿠(船中八策) 등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비책을 고토(後藤)에게 일러줘, 토사한(土佐藩)은 토바쿠(倒幕)세력의 일익을 맡는 것이 가능하였다.

용어 설명
– 후토코로 가타나(懐刀) ふところ-がたな
기밀에 참여하는 심복부하.

– 고부갓타이(公武合体) こうぶ-がったい
고(公)는 텐노(天皇)의 정부 부(武)는 도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의 정부를 나타내며 텐노(天皇)와 바쿠후(幕府)가 협력해야 한다는 사상. 고부갓타이(公武合体)를 실천하기 위해 고메이(孝明) 텐노(天皇)의 누이 카즈노미야(和宮)와 쇼군(将軍)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가 정략결혼을 한다.

– 죠시(上士) じょうし
부케시대(武家時代)에 신분(身分)이 높은 부시(武士).

– 고시(郷士) ごうし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농촌에 살던 부시(武士).

– 죠이(攘夷) じょうい
외세(外勢)를 배척(排斥)하고 개국(開國)을 반대함.

–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 たいせい-ほうかん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7年) 11월 9일 도쿠가와(徳川) 15대 쇼군(将軍) 요시노부(慶喜)가 세이이 타이쇼군(征夷大将軍)의 직(職)을 그만두고, 정권을 조정(朝廷)에 반상(返上)하는 것을 제의, 이튿날 조정(朝廷)이 그것을 허가한 일. 고부갓타이파(公武合体派)의 전 토사(土佐) 한슈(藩主) 야마노치 토요시게(山内豊信)의 상신에 의하지만, 토바쿠(討幕)의 명분을 상실한 것으로 보았던 토바쿠파(討幕派)는 동일 토바쿠(討幕)의 밀칙(密勅)을 얻어, 쿠데타(Coup d’état)에 의한 요시노부(慶喜)의 사관납지(辞官納地)를 결정하고, 토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를 거쳐 보신센소우(戊辰戦争)로 발전시켰다.

– 센츄핫사쿠(船中八策) せんちゅう-はっさく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7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상경(上京)중에 선내(船中)에서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에 제시한, 8가지 조목으로 이루어진 신 국가구상.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 ・ 의회설치 ・ 대전제정(大典制定) ・ 해군확장 ・ 제 외국과의 국교수립(国交樹立) 등.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은 토사한(土佐藩)의 상신에 의해 실현, 나머지는 5개 조의 서약문과 신정부에 계승된다.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사진 출처
근대 일본인의 초상(近代日本人の肖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