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세이칸론(征韓論)

Japan, 維新の嵐 ・ 幕末志士伝(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 三条実美(산죠 사네토미)

번역(翻訳): 방석구

三条実美(さんじょう さねとみ)
산죠 사네토미(三条実美)

天保8年(1837) ~ 明治24年(1891). 享年55歳.
텐포 8년(天保 8年, 1837年) ~ 메이지 24년(明治 24年, 1891年). 향년 55세.

 公家。藤原北家の分家で、摂関家に次ぐ清華家の一つである三条家に生まれる。父は三条実万、母は土佐山内家の出身。
 쿠게(公家).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의 분가로 셋칸케(摂関家)에 버금가는 세이가케(清華家)의 하나인 산죠케(三条家)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산죠 사네츠무(三条実万), 어머니는 토사(土佐) 야마노우치(山内家) 출신이었다.

 和漢学の大家であり、同時に熱烈な尊攘思想家だった富田織部に学んだことが、実美の人生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また、三条屋敷には武市半平太や桂小五郎、平野国臣など多くの勤皇家が出入りしており、彼らとの深い親交が急進的な尊攘思想と反幕精神を植え付け、過激派公卿・三条実美を作り上げた。そして尊攘運動の朝廷側の旗頭として担ぎ上げられるにつれ、実美自身も己れの存在や活動が幕府に大きな圧力を与えられることを知り、次第に尊攘運動にのめり込んでいった。
 와칸가쿠(和漢学) – 일본(日本)과 중국(中国)의 학문 – 의 대가인 동시에 열렬한 손죠(尊攘) 사상가(思想家)였던 토미타 오리베(富田織部)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사네토미(実美)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산죠 야시키(三条屋敷) – 저택 – 에는 타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나 카츠라 코고로(桂小五郎), 히라노 쿠니오미(平野国臣)등 다수의 킨노가(勤皇家)가 출입하고 있어, 그들과의 깊은 친교가 급진적인 손죠사상(尊攘思想)과 반바쿠후(反幕府) 정신을 이양시켜, 과격파 쿠교(公卿) ・ 산죠 사네토미(三条実美)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나서 손죠(尊攘)운동의 조정(朝廷)측 하타가시라(旗頭) – 집단의 장(長) – 로 추대됨에 따라, 사네토미(実美) 자신도 자신의 존재나 활동이 바쿠후(幕府)에 강한 압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지, 점차 손죠(尊攘)운동에 빠져들고 있었다.

 公家の中では岩倉具視などと並んで気骨のある、活動的な人物だった。八・一八の政変で京を追われてもなお、勤皇志士たちの精神的支柱となった役柄は特筆されるべき。
 쿠게(公家)중에서는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등과 함께 기개 있는 활동적 인물이었다. 8 ・ 18정변(8 ・ 18の政変)으로 쿄토(京都)에서 쫓겨났음에도, 킨노지사(勤皇志士)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것은 특필할만하다.

 しかし元来、三条家は笛の名流として知られ、実美自身、本来は穏やかな物腰と風雅な人柄だった。激動の時代の矢面に立った実美だが、維新後に征韓論をめぐって西郷隆盛らと対立した際には、板挟みのストレスから人事不省に陥るなど、実際には過敏すぎる神経の持ち主だった。あるいは、維新までの分を越えた激しい倒幕運動が、実美の精神を著しく蝕んでいたのかもしれない。
 그러나, 산죠케(三条家)는 피리의 명류로 알려져 있고, 사네토미(実美) 자신도 본래는 온후한 태도와 풍아(風雅)한 인품이었다. 격동의 시대에 진두에 선 사네토미(実美)였지만, 유신(維新)후 세이칸론(征韓論)을 둘러싸고 사이고 타카모리(西郷隆盛)등과 대립했을 즈음에는, 딜레마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는 등, 실제로는 너무 과민한 신경의 소유자였다. 혹은 유신(維新)까지의 격렬한 토바쿠(倒幕)운동이 사네토미(実美)의 정신을 눈에 띄게 해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인물 설명
– 산죠 사네츠무(三条実万) さんじょう さねつむ
쿄와 2년(享和 2年, 1802年) ~ 안세이 6년(安政 6年, 1859年)

에도말기(江戸末期)의 쿠게(公家). 나이다이진(内大臣). 무칙허 조약(無勅許条約) ・ 쇼군(将軍)의 후계자 문제로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와 대립,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에 의해 칩거 및 출가.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