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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歴史のかたち(역사의 형체) 사나다(真田)의 로쿠몬센(六文銭)을 보다

번역(翻訳): 방석구, 진행도: 6/6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상(像)

真田の六文銭をみる
사나다(真田)의 로쿠몬센(六文銭)을 보다

文=森秀和
글: 모리 히데카즈(森秀和)

オンリーワン in 戦国
센고쿠시대(戦国時代)에 존재했던 단 하나
これが「真田の六文銭」だ。
그것이 「사나다(真田)의 로쿠몬센(六文銭)」이다.

 六文銭は、三途(さんず)の川の渡し賃として死者の棺(ひつぎ)に入れた六道銭を表し、これを旗印に、となればそれは、いつでも心おきなく死んでみせるという覚悟を掲げたのだ。
 로쿠몬센(六文銭)은 삼도천(三途の川)의 나룻뱃삯으로서, 죽은 자의 관에 넣는 여섯 푼의 동전(六道銭)을 나타낸다. 그것을 하타지루시(旗印)에 넣는다는 것은 언제라도 거리낌 없이 죽겠다는 각오를 내세웠던 것이다.

 慶長19年(1614年)から翌20年にかけての大坂の陣で、寡兵をもって大軍に立ち向かい、敵の徳川方に「日本一の兵(つわもの)」と言わしめた 真田信繁(幸村)の旗。ぼろぼろになった縦2・5メートル、幅30センチの麻の地に印(しる)された六つの「永楽通宝」。大坂の陣に際し、幸村が奉納した という志紀長吉神社(大阪市平野区)に残っていた。
 케이오 19년(慶応 19年, 1614年)부터 다음해인 20년에 걸쳐 일어난 오사카의 진(大坂の陣)에서 적은 병력으로 대군에 맞서, 적인 도쿠가와(徳川)측으로부터 「일본(日本) 제일의 부시(武士)」라고 불린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 –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이하 생략 – 의 기(旗). 이제는 너덜너덜해진 세로 2.5m, 폭 30cm의 마에 발염 된 여섯 개의 「①에이라쿠츠호(永楽通宝)」. 오사카의 진(大坂の陣)에 임해, 유키무라(幸村)가 봉납했다고 전해지는 시키나가요시 신사(志紀長吉神社)에 – 오사카시(大阪市) 히라노구(平野区)에 소재 – 남아있다.

주(註): ① 에이라쿠센(永楽銭)이라고 합니다.

 圧倒的な不利を承知で豊臣家に最後まで尽くして殉じた幸村は、後の講談や小説を通じ、忠義の将として庶民に語り継がれてきた。今どきは戦国時代を舞 台にした人気のテレビゲームで、六文銭を刻んだ甲冑(かっちゅう)を身につけ、群がる敵兵をなぎ倒し、義を貫く勇将ぶりは子どもにも知られる。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임을 인지하고서도 최후까지 토요토미가(豊臣家)에 봉공해 생사를 같이한 유키무라(幸村)는 훗날 무용담이나 소설을 통해, 충의의 장수로서 구전되어왔다.

 しかし、幸村はただ主家に付き従い散っていった忠臣だったのか。オンリーワンの自分らしさに脚光があたる現代の視点からとらえれば、戦国を主体的に生き切ろうとした、違う幸村像が立ち現れてくるように思える。
 하지만, 유키무라(幸村)는 단지 주가(主家)를 쫓아 흩어져간 수많은 충신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일까? 단 하나뿐인 「자신다움」에 각광받는 현대의 관점에서 본다면, 센고쿠(戦国)를 주체적으로 살다 절명한, 또 다른 유키무라(幸村)상이 모습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사카 여름의 진도(大坂夏の陣図) 병풍(屏風) 중 일부

自分らしく 真一文字に
일직선으로

 慶長19年(1614年)12月、大坂冬の陣。大坂城の出城の「真田丸」を根拠に勇戦する真田信繁(幸村)に徳川家康がひそかに寝返るよう持ちかけ た申し出を、幸村はそう押し返した。家康が示した条件は、幸村の父・昌幸が領していた信州に10万石。その後、見返りは信州一国につり上がり、今でいえば 破格のヘッドハンティングだったが、幸村は浪人から一軍を率いる身に取り立ててくれた豊臣秀頼への恩義を理由についに首を縦に振らなかった。
 케이쵸 19년(慶長 19年, 1614年) 12월, 오사카 겨울의 진(大坂冬の陣). 오사카성(大坂城)의 외성인 사나다마루(真田丸)를 근거지로 용전 분투하는 사나다 노부시게(真田信繁)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은밀히 배반할 것을 제의했지만, 유키무라(幸村)는 그것을 거절했다. 이에야스(家康)가 제시한 조건은 유키무라(幸村)의 부친인 마사유키(昌幸)가 영지로 삼았던 신슈(信州) 10만 고쿠(石)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파격적인 헤드헌팅(Headhunting)이었지만, 유키무라(幸村)는 일게 로닌(浪人)에서 일군을 통솔하는 장수로 발탁해주었던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 대한 은의를 이유로 끝까지 승낙하지 않았다.

 後藤又兵衛や毛利勝永、長宗我部盛親……。大坂の陣ではほかにも豊臣方の多くの武将が奮迅の戦いを見せ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幸村ほど後世、語られたものはいない。なぜか。
 고토 마타베에(後藤又兵衛)나 모리 카츠나가(毛利勝永),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오사카의 진(大坂の陣)에서는 이들 외에도 토요토미(豊臣)쪽의 많은 부쇼(武将)들이 분기탱천한 전투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키무라(幸村) 만큼 후세에 회자되는 이는 없다. 왜일까?

 豊臣家から誘われ、大坂に入城した時は、幸村はむしろ世間的にはほとんど無名だった。
 토요토미가(豊臣家)로부터 권유를 받아, 오사카(大坂)에 입성할 무렵의 유키무라(幸村)는 세간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무명의 인물이었다.

 幸村がまずやったのは、約5000の浪人兵の旗や具足を赤色で統一したことだ。「赤備(あかぞな)え」はかつて真田家が仕え、戦国最強と言われた武 田軍の代名詞。実態は寄せ集めでも精鋭を装ったのだ。そして秀頼に願い出て、徳川方20万の主力が殺到してくるとみられた城の南側に真田丸を築き、立てこ もった。
 유키무라(幸村)가 가장먼저 행한 것이 약 5000인에 이르는 로닌(浪人) 부대의 갑옷과 투구를 적색으로 통일한 것이다. 「아카조나에(赤備え)」는 일찍이 사나다가(真田家)가 사관한 센고쿠(戦国) 최강이라 일컬어졌던 다케다군(武田軍)의 대명사였지만, 유키무라(幸村)의 아카조나에(赤備え)는 정예를 가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히데요리(秀頼)에게 출원해, 도쿠가와(徳川)측 20만 주력이 쇄도해 올 것으로 보여지는 남단에 사나다마루(真田丸)를 구축했다.

 赤備えも真田丸も、士気を高めて城を防御するためには戦略上必要だった、というのが大方の見方だ。だが味方からも、目立ちすぎて逆に全体の勝敗を左 右する切所にされてしまう、との声が上がったほど、幸村が自分の働きに意識的であったのは、別の思いもあったのではないか。まるで大軍の中に埋没するのを よしとしないかのような、「忠義」の情からだけでは説明しにくい挙動の手がかりは、紀州・九度(くど)山にあった。
 아카조나에(赤備え)도 사나다마루(真田丸)도, 아군의 사기를 높여 성(城)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상 불가분의 요소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하지만, 아군에게까지 지나치게 눈에 띄어 거꾸로 전체의 승패를 좌우하는 악수(悪手)가 되었다는 목소리가 높았을 정도로 유키무라(幸村)가 자신의 행동에 의식적이었던 것은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흡사 대군 속에 묻히는 것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충의(忠義)」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거동의 단서는 키슈(紀州)의 쿠도산(九度山)에 있었다.

魂燃やした大坂の陣
혼을 불사른 오사가의 진(大坂の陣)

 高野山のふもと、和歌山県九度山町。紀の川沿いの傾斜地に今も路地が入り組んだ集落がある。関ヶ原の戦いで徳川方に付いた兄・信之と別れ、父とともに西軍に味方した幸村は、敗戦後14年間をここに蟄居(ちっきょ)した。
 코야산(高野山) 산기슭, 와카야마켄(和歌山県) 쿠도야마쵸(九度山町). 키이(紀伊) 강가의 경사지에는 지금도 골목이 복잡한 취락이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戦い)에서 도쿠가와(徳川) 측에 가담했던 형 노부유키(信之) –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 – 와 결별하고, 아버지와 함께 서군(西軍)에 가세한 유키무라(幸村)는 패전 후 14년간을 이곳에서 칩거(蟄居)했다.

 この間、信州の国元に送った手紙から、これまであまり顧みられてこなかった実像が見えてくる。
 이 사이에 신슈(信州) 본국(本国)에 보낸 편지에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실상이 밝혀진다.

 「とかくとかく、年のより申し候事、口惜しく候」「去年よりにわかにとしより、事の外病者に成り申し候。はなどもぬけ申し候。ひげなどもくろきはあまりこれ無く候」
 「어째든, 나이가 든 것이 유감입니다」 「지난해부터 갑자기 노쇠해진 것인지, 뜻밖에 병약한 몸이 되어, 이도 몇 개 빠졌습니다. 수염도 검은 곳은 별로 없습니다」

주(註): 위 내용은 쿠도산(九度山)시절에 적은 유키무라(幸村)의 편지로, 케이쵸 17년(慶長 17年, 1612 年)에서 18년 사이로 추정된다.

 「関ヶ原」後は、大失業時代でもあった。日本中にあふれた浪人は推計で10万人以上。30代半ばから40代の働き盛りを“失業者”として過ごした幸 村の書簡には、自らを「大くたびれ者」と評した言葉も出てくる。終身雇用や年功序列といった枠組みが崩れ、失業やリストラ問題に直面している現代人の状況 と重ならなくもない。
 「세키가하라(関ヶ原)」 이후는 대실업시대(大失業時代)이기도 했다. 일본 내에 넘치는 로닌(浪人)은 추계(推計)해서 10만 명 이상. 30대 중반부터 40대의 한창 일할 나이를 “실업자”로서 보낸 유키무라(幸村)의 서간(書簡)에는 스스로를 「굉장히 무기력한 사람」이라고 평한 문장도 나온다. 종신 고용(終身雇用)이나 연공 서열(年功序列)이라는 구조가 붕괴되어, 실업이나 리스트럭처링(Restructuring) – 구조 조정 – 문제에 직면한 현대인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真田家の子孫にあたる真田幸光・愛知淑徳大教授(48)は「人生の多くを他家への人質や浪人として送り、迫り来る老いを見つめるなかで、幸村はこれ から自分がどう生きていくかを強く考えたはず。自らの腕に賭けたいという思いは強まった」と、その時代に主体的になっていく幸村をみる。
 사나다가(真田家)의 자손이 되는 사나다 유키미츠(真田幸光) 아이치슈쿠토쿠대(愛知淑徳大) 교수(教授) (48)는 인생의 대부분을 타가의 인질이나 로닌(浪人)으로서 보내 다가오는 늙음을 직시하면서, 유키무라(幸村)는 이제부터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심사숙고(深思熟考)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 스스로 역량을 발휘하겠다는 생각이 강했을 거라고, 그 시대를 주체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유키무라(幸村)를 떠올린다.

 慶長20年、夏の陣。5月7日、すでに真田丸は払われ、丸裸の城を背に15万の敵を迎え撃つしかない。味方は5万。この日、幸村は、一挙に家康の首 を取りにいく作戦を主張した。戦況を逆転させる大胆な策、というより、そのときの幸村の生き方にいちばん合致していたのだと言えるのかもしれない。
 케이쵸 20년(慶長 20年, 1615年) 여름의 진(陣). 이미 사나다마루(真田丸)는 존재하지 않아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성을 등에 둔 유키무라(幸村)는 15만의 적과 맞서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아군은 5만. 그날, 유키무라(幸村)는 일거에 이에야스(家康)의 목을 취하는 작전을 주장했다. 전황을 뒤집을 만한 대단한 책략이라기 보다는 당시 유키무라(幸村)의 인생관과 가장 일치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真田軍が陣取った茶臼山は、敵陣からは真っ赤なツツジの花が咲いているように見えたという。そこから、赤の真一文字が描かれて徳川軍に切り込んでく る。突撃、3度。徳川家の『駿府記』も、「関東勢少し敗北の処」と書かざるを得なかったほど、徳川の本陣は散り散りとなって、家康も逃げ惑ったと伝わる。
 적진에서 바라본 사나다군(真田軍)이 진을 친 챠우스산(茶臼山)은 마치 새빨간 철쭉꽃이 물들어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곳으로부터 붉은 일직선이 내려와 날카롭게 도쿠가와군(徳川軍)의 본진을 치고 들어갔다. 돌격(突撃)이었다. 그것도 3번에 걸친. 도쿠가와가(徳川家)의 『순푸키(駿府記)』에도 「칸토(関東)의 군세, 국소적으로 패배한 장소」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도쿠가(徳川)와 본진(本陣)은 와해되어, 이에야스(家康) 조차 갈팡질팡했다고 전해진다.

 最後の攻撃を大阪城天守閣主任学芸員の跡部信さん(38)はこう意義づける。「魂を燃やし尽くそうとするかのようにまっすぐ目標に向かっていった。幸村の生き方を象徴したひときわ鮮烈な場面だった」
 최후 공격을 오사카성(大阪城) 텐슈가쿠(天守閣) 주임 큐레이터(Curator)인 오토베 마코토(跡部信) (38)씨는 이렇게 의미를 부여한다. 「마지막 남은 혼을 불사르려는 것처럼, 목표를 향해 곧바로 돌진했다. 유키무리(幸村)의 사는 방식을 상징하는 한층 더 선열(鮮烈)한 장면이었다」

 茶臼山の北、大阪市天王寺区の安居神社。市街地へと下る勾配(こうばい)は、幸村が徳川本陣へと駆け下りていった情景を残す。
 챠우스산(茶臼山) 북쪽, 오사카시(大阪市) 텐노지구(天王寺区)의 야스이 신사(安居神社). 시가지로 내려가는 경사에는 유키무라(幸村)가 도쿠가와(徳川)의 본진(本陣)을 기마(騎馬)로 돌입(突入)했던 자취가 남아있다.

 夕刻、傷ついた幸村は境内で休息していたところを敵兵に囲まれ、ほとんど抵抗することなく首を討ち取らせたという。中島一熈(かずひろ)宮司 (64)が思いをはせる。「九度山にとどまることも、家康の誘いに応じることもせず、幸村は自分の力だけを信じた。無念さに混じり、言いようのない達成感 もあったのではないか」。大坂城入城から7か月。享年49歳。
 저녁 무렵, 부상당한 유키무라(幸村)는 경내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적병(敵兵)에게 포위당해,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목숨을 내어주었다 한다. ②구지(宮司)인 나카지마 카즈히로(中島一熈) (64)씨는 이렇게 말한다. 「쿠도산(九度山)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이에야스(家康)의 권유조차 뿌리치고, 유키무라(幸村)는 오직 자신의 힘만을 믿었다. 원통함이 섞인 형용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Katharsis)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사카성(大坂城) 입성(入城) 후로부터 7개월. 향년 49세였다.

주(註): ② 구지(宮司)는 신사(神社)의 최고 신관(神官)을 말합니다.

 「眞田幸村戦死跡之碑」を訪れる人は絶えない。“敗者”への供養だろうか。
 「사나다 유키무라(眞田幸村) 전사(戦死) 적지비(跡之碑)」를 방문하는 인적은 끊이지 않았다. “패자(敗者)”에 대한 공양(供養)이었을까?

 「幸村は体制に組み込まれるだけでなく、最後まで自分らしさを追い求めた。そこは、『勝ち組、負け組』と勝利や成功がすべてのように言われる今、 もっと注目されていい」と、真田教授は言う。古戦場の上に立ち並ぶビルをなぞった風が、するりと入ってきて、境内の木々を揺らした。
 유키무라(幸村)는 체제에 순응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자기다움을 추구했다. 이것은 『성공한자와 실패한자』로 양분되 마치 승리나 성공이 전부인양 회자(膾炙)되는 지금, 좀더 주목 받아야 할 것이라고 사나다(真田) 교수(教授)는 말한다. 옛 전장(戦場) 위에 늘어선 빌딩을 휘감은 바람이 슬쩍 들어와 경내(境内)의 나무들을 흔들었다.

おしまい

覚え書き
비망록(備忘録)

 関ヶ原の戦いでは、西軍に属した93家が改易・減封となり、全国総禄高の約3割に当たる約650万石が没収された。その後さらに、後継者不足などで 36家が改易(約300万石没収)され、主家を失い、新たな仕官先がない「牢人」が大量に発生した。大坂冬・夏の陣では一人の大名も豊臣方につかなかった ため、実態は徳川幕府軍と、豊臣方が報償を示して集めた牢人との合戦だったとも言える。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서군(西軍)에 속한 93개의 가문(家門)이 카이에키(改易) 또는 감봉(減封)을 당해, 전국 총 록고(総禄高) – 총 석고(石高) – 의 약 3할에 이르는 약 650만석(万石)이 몰수되었다. 그 후, 재차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 등으로 36개 가문(家門)이 카이에키(改易) – 약 300만석(万石) 몰수 – 되어, 주가(主家)를 잃고 새로 사관할 곳이 없는 「③로닌(牢人)」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오사카 겨울 ・ 여름의 진(大坂冬・夏の陣)에서는 한 명의 다이묘(大名)도 토요토미(豊臣)측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도쿠가와 바쿠후군(徳川幕府軍)과 토요토미(豊臣)측이 보상을 제시해 모인 로닌(牢人)과의 접전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주(註): ③ 로닌(牢人)은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 이전은 「로닌(牢人)」으로 중기 이후는 「로닌(浪人)」으로 표기된다고 합니다.

見どころ
볼거리

 「真田六文銭」の旗は、大阪市平野区の志紀長吉神社に保管され、祭礼時などに加え、今年は正月にも公開された。天王寺区には茶臼山と安居神社のほ か、真田丸があったという真田山公園などもある。真田家の屋敷跡とされる和歌山県九度山町の真田庵では、幸村所用という十文字槍や真田紐(ひも)の織り 機、六文銭の陣幕などを展示している。高野山の蓮華定院は真田家の菩提(ぼだい)寺。
 「사나다(真田) 로쿠몬센(六文銭)」의 기(旗)는 오사카시(大阪市) 히라노구(平野区)의 시키나가요시 신사(志紀長吉神社)에 보관되어 제례(祭礼) 등에 공개 되고 있다. 텐노지구(天王寺区)에는 챠우스산(茶臼山)과 야스이 신사(安居神社) 외에도 사나다마루(真田丸)가 존재했던 사나다산 공원(真田山公園)도 있다. 사나다가(真田家)의 저택의 자취로 여겨지는 와카야마켄(和歌山県) 쿠도야마쵸(九度山町)의 사나다암(真田庵)에는 유키무라(幸村)가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쥬몬지야리(十文字槍)나 사나다 끈(真田紐)의 ④수직기(手織機), 로쿠몬센(六文銭)의 진막(陣幕) 등이 전시되고 있다. 더불어 코야산(高野山)의 연화 정원(蓮華定院)은 사나다가(真田家)의 명복을 비는 보리사(菩提寺)이다.

주(註): ④ 수직기(手織機)는 방직기(紡織機) 정도를 말합니다.

용어 설명
– 삼도천(三途の川) さんず-のかわ
【仏】중국(中国)에서 지어진 십왕경(十王経)에 의해, 삼도천(三途の川)은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존재하며, 죽은 지 7일째 극선(極善)과 극악(極悪)이 없는 이가 건넌다고 하는 강. 여기에는 유수의 속도가 각기 다른 3개의 여울이 있는데, 생전의 업에 따라 건너는 장소가 변한다고 한다. 강가에는 노파(姥)와 노인(翁)의 귀신이 있어 망자의 옷을 빼앗는다고 한다.

– 하타지루시(旗印) はたじるし
기(旗)에 문양(紋)이나 글자(字)를 발염(抜染)해, 전장(戦場)에서 메지루시(目印)로 사용하는 것.

– 오사카의 진(大坂の陣) おおさか-のじん
케이쵸 19년(慶長 19年, 1614年) 겨울과 익년 여름에 도쿠가와씨(徳川氏)가 토요토미씨(豊臣氏)를 멸망시키기 위해 일으킨 두 번의 전쟁.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호코지(方広寺) 종명(鐘銘)의 문제를 구실로 오사카성(大坂城)을 공격했지만, 성(城)이 요해 견고해 떨어지지 않자, 소토보리(外堀)를 메우는 것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 오사카 겨울의 진(大坂冬の陣).

그 후, 이에야스(家康)가 우치보리(内堀)도 메워 히데요리(秀頼) –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 의 텐포(転封)를 강요하자 다음해에 전투가 재개되었다. 토요토미군(豊臣軍)은 패해, 히데요리(秀頼)와 요도기미(淀君) 이하 모두가 자결, 토요토미씨(豊臣氏)는 멸망했다. – 오사카 여름의 진(大坂夏の陣).

– 에이라쿠센(永楽銭) えいらく-せん
중국(中国)의 명대(明代)인 영락 9년(永楽 9年, 1411年)에 주조(鋳造)된 동전(銅銭). 표면에 「에이라쿠츠호(永楽通宝)」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에 수입되어, 에도(江戸) 초기까지 활발히 통용되었지만 케이오 13년(1608年) 금지 되었다. 에이라쿠츠호(永楽通宝)라고도 한다.

– 아카조나에(赤備え) あかぞなえ
갑옷과 투구 및 마구(馬具) 등을 모두 붉은 색으로 통일한 군대.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의 군대가 유명하다.

– 쿠루와(曲輪) くるわ
성벽(城壁) ・ 해자(堀) 또는 절벽 ・ 하천 등으로 나뉘어진 구획.

원문 출처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 2006년 3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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