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翻訳): 방석구
楢崎龍(ならさき りょう)
나라사키 료(楢崎龍)
天保12年(1841) ~ 明治39年(1906). 享年66歳.
텐포 12년(天保 12年, 1841) ~ 메이지 39년(明治39年, 1906年). 향년 66세.
京都の勤皇医、楢崎将作の娘で、祖父は長州藩士だったという。龍馬の恋人で、後に伴侶となる。家族構成には諸説あるが、父の死後は、気丈にもお龍が女手一つで妹弟たちを育てた。寺田屋お登勢に見込まれて養女となり、その縁で龍馬と深い仲になったといわれているが、最近では龍馬の口利きで寺田屋の養女になったともいわれている。
쿄토(京都)의 킨노파(勤皇派)이자 의사인 ①나라사키 쇼사쿠(楢崎将作)의 딸로, 조부는 쵸슈(長州)의 한시(藩士)였다고 한다. 료마(龍馬)의 연인으로 후에 반려자가 된다. 가족 구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버지의 죽음 후에는 당차게도 여자 혼자 힘으로 동생들을 키웠다. 테라다야(寺田屋)의 오토세(お登勢)의 눈에 들어 양녀가 되었다. 그 인연으로 료마(龍馬)와 깊은 사이가 되었다고 하지만, 최근에는 료마(龍馬)의 소개로 테라다야(寺田屋)의 양녀가 되었다고도 한다.
주(註): ① 나라사키 쇼사쿠(楢崎将作)는 안세이의 대옥(安政の大獄)에 연류 되어 옥사했다.
気性が激しく新し物好きで、旧来の概念には囚われず、奔放に生きる姿が龍馬のハートを揺り動かした。当時の日本人の恋愛観を軽く飛び越えて、二人は互いに手をつないでしばしば京の町を散歩したという。芸事にも達者で、三味線や月琴を弾いた。
성미가 격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심이 강해서, 구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그녀의 모습이 료마(龍馬)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당시 일본인(日本人)의 연애관을 가볍게 뛰어넘어, 두 명은 서로의 손을 잡고 연신 쿄토(京都)의 거리를 거닐었다고 한다. 예능에도 소질이 있어 샤미센(三味線)이나 월금(月琴)에도 능숙했다.
性格の激しさは嫉妬深さにもつながり、女遊びを海援隊の隊士にチクられ、龍馬はかなりやり込められたらしい。龍馬の死後は、一時三吉慎蔵の下に妹ともども身を寄せ、さらに土佐の坂本家にも住んだが、同じような女傑の乙女姉さんとはどうしても反りが合わなかったのか、転げ出している。
성격의 격렬함은 질투심에도 이어져,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카이엔타이(海援隊)의 타이시(隊士)에 감독시켜 료마(龍馬)는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료마(龍馬) 사후에는 잠시 미요시 토키하루(三吉慎蔵)에게 동생과 함께 몸을 의탁, 다시금 토사(土佐)의 사카모토가(坂本家)로 몸을 옮겼지만, 동질의 여결인 시누이 오토메(乙女) – 사카모토 오토메(坂本乙女) – 와는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일까? 결국 집을 나오고 말았다.
その後、行商人の西村松兵衛と再婚するが生涯龍馬を忘れることができず、酒に酔っては『私は坂本龍馬の妻だった』と泣き暮したらしい。しかし国事に奔走する龍馬とお龍が夫婦として生活した時間は、ほんのわずかでしかなかった。
그 후, 행상인인 니시무라 마츠베에(西村松兵衛)와 재혼하지만 평생 료마(龍馬)를 잊지 못하고, 술에 취해서는 『나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아내였다』라고 한탄했던 것 같다. 그러나 국사에 분주한 료마(龍馬)가 오료(お龍)와 부부로서 함께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当時の女性として傑出した気丈さとハイカラさを持ったお龍は、やはり男として傑出していた龍馬でなければ、幸せをつかむことはできなかった。
당시의 여성으로서 빼어났던 오료(お龍)는 역시 남자로서 빼어난 료마(龍馬)가 아니었다면, 행복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