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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維新の嵐 ・ 幕末志士伝(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 山内容堂(야마노우치 요도)

번역(翻訳): 방석구, 총 진행도 53/56

山内容堂(やまのうち ようどう)
야마노우치 요도(山内容堂)

文政10年(1827) ~ 明治5年(1872). 享年46歳.
분세이 10년(文政 10年, 1827年) ~ 메이지 5년(明治 5年, 1872年). 향년 46세.

 土佐藩藩主。板垣退助や後藤象二郎などの逸材を抜擢し、土佐藩を時勢の中枢に押し上げた名君。無責任で無能なのが当たり前の”殿様”という種族の中で、容堂は独自の思考力を持ち、高度な政治力と判断力を備えた幕末でも屈指の大名だった。
 토사한(土佐藩) 한슈(藩主).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나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郎) 등의 인재를 발탁하고, 토사한(土佐藩)을 시세의 중심에 올려놓은 명군. 무책임하고 무능한 것이 당연한 “토노사마(殿様)”라는 종족 속에서, 요도(容堂)는 독자적인 사고력을 지녀, 고도의 정치력과 판단력을 갖춘 바쿠마츠(幕末)에서도 굴지의 다이묘(大名)였다.

 元来、徳川に同情的で、幕末のギリギリの段階まで武力倒幕に反対し続けた。が、奇しくもそれは、忌み嫌った郷士出身の坂本龍馬の思想を、全面的に認めることにもなった。
 본래, 도쿠가와(徳川)에 동정적이어서, 바쿠후(幕府)의 급박한 상황에 이르러서도 무력 토바쿠(倒幕)에는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実質的に土佐と容堂は、大政奉還や船中八策など龍馬の献策によって、次世代のポリティカルレースに生き残ることができたといえる。藩祖、山内一豊が徳川家に大恩を受けたから、というのが容堂の佐幕思想の根幹になっていたが、実際には下級階層の武士たちが主軸となった薩長閥に対する嫌悪感が、最大の動機だったようにも思える。
 실질적으로 토사(土佐)와 요도(容堂)는 타이세이호칸(大政奉還)이나 센츄핫사쿠(船中八策) 등 료마(龍馬)의 헌책(献策)에 의해서, 차세대 정치경쟁(Political Race)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소(藩祖) 야마노우치 카즈토요(山内一豊)가 도쿠가와가(徳川家)에 ①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요도(容堂)의 사바쿠(佐幕) 사상의 근간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하급계층(下級階層)의 부시(武士)들이 주축이 된 삿쵸(薩長) 세력에 대한 혐오감이 최대의 동기였다고 생각된다.

주(註): ① 큰 은혜라는 것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차례로 봉공했던 야마노우치 카즈토요(山内一豊)가 케이쵸 5년(慶長 5年, 1600年)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측에선 공적을 인정받아 토사노쿠니(土佐国) 20만석을 하사 받고 한소(藩祖)가 된 일을 가리킵니다. 이것으로부터 토사(土佐)의 뿌리깊은 한시(藩士)와 고시(郷士)간의 갈등이 시작됩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このように、容堂には抜き難い身分差別思想があり、武市半平太や坂本龍馬を「郷士だから」という理由だけで虫ケラのように扱った。維新後になってやっと強固な差別思想もやわらぎ、武市や龍馬を失った大きさに気づいたという。
 이처럼 요도(容堂)에게는 어쩔 수 없는 신분차별 사상이 있어, 타케치 한페이타(武市半平太)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고시(郷士)니까」라는 이유만으로 버러지처럼 취급했다. 유신(維新) 후가 되어서야 겨우 강고한 차별사상이 누그러져, 타케치(武市)나 료마(龍馬)를 잃어버린 크기를 깨달았다고 한다.

 洒脱な人で、自らを鯨海酔侯(鯨の泳ぐ海、すなわち土佐湾の酔っぱらい大名)と号して日に3升の酒を飲んだといわれる。維新後には要職に就くも、周囲の成り上がり者たちになじまず隠棲。妾を十数人も囲い、酒と女に明け暮れる豪奢な晩年を送った。
 소탈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경해취후(鯨海酔侯) – 고래가 헤엄치는 바다, 즉 토사만(土佐湾)의 취객 다이묘(大名) – 라고 칭해, 하루에 3되의 술을 마셨다고 한다. 유신(維新) 후에는 요직(要職)에 올랐으나 주위의 어정뱅이들에 어울리지 않고 은거(隠棲)했다. 수십 명의 첩(妾)을 두고, 술과 여자로 호사스러운 말년을 보냈다.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