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푸쿠(切腹)



모토메(岩求女)의 상황을 설명하면 이이케(井伊家)의 사람들조차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 그래서 그랬던 거였구나. 어쩌면 우리가 지나치게 몰아붙였구나. 누구라도 우리의 대처가 이성적이지 못했었다는 걸 알 수 있구나. 의심할 바 없이 쌍방이 나은 결과를 이끌어냈어야 했어.” 내가 이런 한마디 말이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그건 코토메에게 위안이 됐을 것이오.



후쿠시마케(福島家)의 전직 가신 츠쿠모 한시로(津雲半四郎)는 저녁 6시에 할복(切腹)으로 죽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엉뚱했다. 참석한 많은 이들은 그가 발광할 징조를 보였다고 했다. 이로써 후쿠시마케의 또 다른 전직 가신 치지와 모토메(千々岩求女)가 올해 1월 할복을 청했을 때, 우리의 선택에 과오가 없음이 명백해졌다. 가문의 사무라이다운 엄격함이 온 에도에 메아리쳤다.
이번 사건 또한 우리의 단호한 대처가 둘째 날이 가기도 전에 도시에 퍼졌다. 결과로서 세번째 날 에도죠(江戸城)의 정기 회의에서 주군께 찬사의 말을 들으신 우리의 젊은 벤노스케사마에 따르면 “평화 시에도 여전히 방심하지 않고, 이이케(井伊家)는 이런 원칙을 고수하였으니, 너의 부는 후세에도 번창할 것임이 틀림없다.” 1630년 5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