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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榎本武揚(에노모토 타케아키)

번역(翻訳): 방석구

에노모토 타케아키(榎本武揚)

榎本武揚(えのもと たけあき)
에노모토 타케아키(榎本武揚)

天保7年, 1836 ~ 明治41年, 1908. 享年73歳
텐포 7년(天保 7年) ~ 메이지 41년(明治 41年). 향년 73세.

 幕臣。西洋文明、特に海軍のスペシャリスト。戊辰戦争の末期に北海道を占拠し、独立国家の樹立を目指す。が、官軍に敗れ、後に明治政府の顕官となる。
 바쿠신(幕臣). 서양 문명, 특히 해군의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보신센소우(戊辰戦争) 말기에 홋카이도(北海道)를 점거해, 독립국가 수립을 노렸다. 하지만 관군(官軍)에게 패해, 후에 메이지 정부(明治政府)의 고관이 된다.

 幕閣首脳から将来を嘱望されたエリートで、長崎海軍伝習所で操船法や航海術を修得後、官費でオランダに留学。帰国したのは、幕府が瓦壊する直前の慶応3年だった。
 밧카쿠(幕閣) 수뇌(首脳)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엘리트(Elite)로, 나가사키(長崎) 해군 교습소에서 조선법(操船法)과 항해술(航海術)을 수득(修得)후, 국비로 홀란드(Olanda) – 네덜란드 – 에서 유학(留学). 귀국했던 것은 바쿠후(幕府)가 와괴(瓦壞)하기 직전인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7年)이었다.

 鳥羽伏見の戦いが勃発した頃、軍艦奉行だった榎本はオランダに建造させた最新鋭艦、開陽丸以下、富士山丸など主力艦隊を一手に握る立場にあった。将軍、慶喜を江戸に送り届けた榎本は、品川沖に艦隊を集結して官軍と戦端を開く強硬姿勢を表明。もともと銃火器の性能以外では、兵力でも海軍力でも幕府に劣っていた官軍は、突如として出現した榎本艦隊に恐怖した。が、ここまでが榎本の限界だったといえる。
 토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가 발발했을 무렵, 군칸 부교(軍艦奉行)였던 에노모토(榎本)는 홀란드(Olanda)에서 건조시킨 최신 예함(鋭艦) 카이요마루(開陽丸) 이하, 후지산마루(富士山丸)등 주력 함대(艦隊)를 한 손에 쥐는 입장에 있었다. 쇼군(将軍) 요시노부(慶喜)를 에도(江戸)로 탈출시켰던 에노모토(榎本)는 시나가와(品川) 앞바다에 함대(艦隊)를 집결하고 관군(官軍)과 싸움을 시작하여 강경자세를 표명한다. 원래 총화기의 성능 이외에는, 병력에도 해군력에도 바쿠후(幕府)에 뒤떨어져있던 관군(官軍)은 갑자기 출현한 에노모토(榎本) 함대(艦隊)에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에노모토(榎本)의 한계였다고 말할 밖에 없었다.

 生来、頭がよすぎて先が読めてしまうためか、それとも純粋培養の旗本社会で育った甘さか、榎本には実は本気で海戦を戦い抜く覚悟はなかった。ただ艦隊の軍事力を誇示し、土壇場の切り札として慶喜の安全を確保するのが狙いだったのである。
 본디, 머리가 지나치게 좋아서 앞을 내다본 것인지, 아니면 순수배양(純粋培養)의 기본사회에서 자란 달콤함일까, 실은 에노모토(榎本)에게는 진심으로 해전을 치러 이겨낼 각오는 없었다. 다만 함대(艦隊)의 군사력을 과시해 비장의 카드로서 요시노부(慶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北海道戦争でも、土方歳三など主戦派を見捨てて簡単に降伏してしまうし、要請があれば仇敵の明治新政府にも出仕する。根っからのテクノクラートである榎本にとって、最も重要なのは、自分の知識と技術を新生ニッポンのために役立てることだった。
 홋카이도(北海道) 전투에서도, 히지카타 토시죠(土方歳三)등 주전파(主戦派)를 버리고서 간단히 항복해버렸고, 요청이 있으면 구적(仇敵)인 메이지 신정부(明治新政府)에도 출사를 했다. 타고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 과학자나 기술자 출신의 행정관 – 인 에노모토(榎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신생 일본(Nippon)을 위해서 유용하게 쓰는 것 뿐이었다. – 하코다테센소우(箱館戦争)

용어 설명
– 왕정복고(王政復古) おうせいふっこ
케이오 3년(慶応 3年, 1868年) 12월 9일, 토바쿠파(討幕派)가 왕정복고(王政復古) 대호령(大号令)을 발표해, 에도 바쿠후(江戸幕府)를 폐하고 정권(政権)을 조정(朝廷)으로 옮긴 정변(政変).

– 토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 とばふしみのたたかい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1월 3일에 일어난 큐바쿠후군(旧幕府軍) 및 아이즈(会津) ・ 쿠와나한(桑名藩) 병사와, 삿쵸군(薩長軍)과의 내전(内戦). 신정부(新政府)가 왕정복고(王政復古) 대호령(大号令)에 잇따라 코고쇼 회의(小御所会議)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사관납지(辞官納地)를 결정한 것에 대해, 큐바쿠후(旧幕府)측이 거병(挙兵), 토바(鳥羽) ・ 후시미(伏見)에서 삿쵸군(薩長軍)과 교전(交戦). 보신센소우(戊辰戦争)의 발단이 되었지만, 큐바쿠후군(旧幕府軍)의 대패로 종료되어、토바쿠파(討幕派)의 우세가 확립되었다.

– 보신센소우(戊辰戦争) ぼしん-せんそう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보신(戊辰)의 해에 시작되어, 유신정부군(維新政府軍)과 큐바쿠후(旧幕府)측간의 사이에서 16개월간에 걸쳐서 싸웠던 내전(内戦). 정월 토바후시미 전투(鳥羽伏見の戦い)에서 승리했던 정부군(政府軍)은, 4월 에도죠(江戸城)를 접수, 우에노(上野)에 틀어박힌 쇼기타이(彰義隊)는 간토(関東) 각지에서 큐바쿠후(旧幕府) 주전파(主戦派)를 토벌하고, 오우에츠렛판동맹(奥羽越列藩同盟)를 맺어서 대항하는 제한(諸藩)을 아이즈센소우(会津戦争)를 정점으로 10월에는 귀순시켰다. 이듬해 5월, 최후의 거점(拠点) 하코다테고료카쿠(箱館五稜郭)를 함락(陥落)시키고, 내전(内戦)은 종결, 메이지(明治) 절대주의국가 확립으로의 길이 열렸다.

– 우에노센소우(上野戦争) うえの-せんそう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5월, 우에노(上野) 칸에이지(寛永寺)에서 농성하고 있던 쇼기타이(彰義隊)와 관군(官軍)의 전투.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가 지휘하는 관군(官軍)에 하루 만에 진압당했다。

– 쇼기타이(彰義隊) しょうぎたい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측근의 큐바쿠신(旧幕臣)을 중심으로 결정된 유지대(有志隊). 요시노부(慶喜) 호위(護衛) ・ 에도(江戸) 경비(警備)를 명목(名目)으로 우에노(上野) 칸에이지(寛永寺)에 웅거(雄據)하였지만,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가 지휘(指揮)하는 관군(官軍)에 의해 괴멸(壊滅).

– 오우에츠렛판동맹(奥羽越列藩同盟) おうう-えつれっぽんどうめい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5월 보신센소우(戊辰戦争)에서 오우(奥羽) ・호쿠에츠(北越)의 제한(諸藩)이 결탁한 반정부(反政府) 군사동맹(軍事同盟).

– 아이즈센소우(会津戦争) あいづ-せんそう
케이오 4년(慶応 4年, 1868年) 5월, 오우에츠렛판동맹(奥羽越列藩同盟)의 중심이 되었던 아이즈한(会津藩)이, 정부군(政府軍)에 저항했던 전투. 같은 해인 메이지 1년(明治 1年, 1868年) 9월에 개성(開城).

– 큐바쿠(旧幕) きゅうばく
메이지 유신(明治維新)후의 도쿠가와 바쿠후(徳川幕府)를 가리키던 말.

– 카이요마루(開陽丸) かいようまる
바쿠마츠(幕末), 바쿠후(幕府)가 홀란드(Olanda)에서 발주(発注)해서 건조(建造)했던 군함. 배수량(排水量) 약3000톤.

– 고료카쿠 전투(五稜郭の戦い) ごりょうかく-のたたかい
하코다테센소우(箱館戦争).

– 하코다테센소우(箱館戦争) はこだて-せんそう
메이지 1년(明治 1年, 1868年), 에노모토 타케아키(榎本武揚)를 중심으로 한 큐바쿠신(旧幕臣)이 하코다테(箱館) 고료카쿠(五稜郭)에 웅거하여 신정부(新政府) 수립을 도모해, 유신정부군(維新政府軍)에 저항한 전투. 다음해, 에도모토(榎本)등은 항복, 보신센소우(戊辰戦争)는 이곳에서 종결되었다. 고료카쿠 전투(五稜郭の戦い).

원문 출처
유신의 바람 ・ 바쿠마츠지사전(維新の嵐 ・ 幕末志士伝)

관련 서적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씨의 바쿠마츠(幕末) – 쇼기타이의 속셈(彰義隊胸算用)

사진 출처
근대 일본인의 초상(近代日本人の肖像)